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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정 May 31. 2021

번아웃 속에서도 잘 성장했습니다

주니어가 겪은 한 달간의 전쟁

잊지 마세요, 제가 UX/UI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아.. 힘들다 진짜..


한 달간 아침마다 홀로 중얼거린 말이다. 회사에서 오프라인 박람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물론 디자이너는 나 혼자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박람회에 쓰일 모든 시각적 자료를 작업했다. 온라인/오프라인 전시에 사용될 각종 인쇄물, 영상과 더불어 예측 불가한 변수까지 신경 쓸 것 투성이었다. 오프라인 전시는 총 7개 기업만이 선정되었는데 대기업들과 나란히 운영하게 되었다고 하니 비교당할 것에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쪽에서는 팀 단위로 부스를 준비할 텐데 내가 준비한 부스를 애송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정말 주니어 혼자 가능한 게 맞을까?


사실 가장 힘든 점은 무시당하는 것이 아닌 주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수적인 업무를 야근까지 해가면서 완료해야 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한 달간 UX/UI 디자이너가 아니라 BX, 편집,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 업무에 손을 대지도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나를 좀비로 만들었고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만 움직이며 업무를 반복했다. 이러려고 UX/UI 디자이너를 한 게 아니지 않은가.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했고 박람회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현타는 계속됐다. 다른 1년 차 디자이너들은 내가 그래픽을 만질 동안 UX 전문성을 기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며 비교를 했다. 주니어로서 성장하며 커지기는커녕 점점 작아지는 먼지 같았다. 커리어에 도움 되지 않는 일에는 짜증만 가득했고 그렇게 모난 성격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비참함은 큰 고통이 되었다.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정말 성장했다고요?


이미 시작된 일에 짜증만 내는 것은 성장덕후인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불평 속에서 단 1g의 성장 부스러기라도 발견하기 위해 희망적인 말만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래와 같은 자기 합리화는 긍정적인 생각만을 하도록 억지로 주입해 세뇌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규모의 행사를 내 손으로 0부터 100까지 진행하면 많은 경험치를 얻을 거야. 회사 로고와 브랜드 가이드부터 시작해서 앱 프로토타입 시연까지 내 손으로만 일꾼 시각적 결과물이잖아. 100% 나만의 시각적 창조물을 판 깔아서 부스로 만들어 준다는데 좋지 않아? 지금 당장에 이 활동이 도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나중에 도움될 일이 생길 거야. 뼈와 살이 될 경험이라 생각하자. 그래. 어떤 부분이라도 성장해 있을 거야.”


하지만 박람회가 끝난 후 예상치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성장을 해버린 것이다. 지난달 그렇게 풀리지 않던 새로운 서비스 기획의 UI 스케치를 어떤 방향으로 그려나가야 할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 보니 한 달간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디자인 감각이 높아진 것이다. 갑자기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에 나온 '반(反)취약성'이 생각났다. '반(反)취약성'이란 외부의 혼란이나 압력에 오히려 성과가 상승하는 성질이다. ‘반취약성'을 지니면 충격을 원동력으로 삼게 된다. 이를 나의 상황에 대조해보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막연히 대기업에 들어가 순탄히 출세하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취약성의 중요 요건은 가능한 젊을 때 다양한 실패를 맛보고 여러 조직과 커뮤니티를 경험하면서 인적 자본과 사회 자본을 한 장소가 아닌 분리된 여러 장소에 형성하는 것이다. 대기업에 있던 스타트업에 있던 내 경력에 ’반취약성’을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성장과 성공에 있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전시회 준비라는 스트레스는 혼란과 압력을 가했지만 오히려 업무 효과를 상승시켜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수적인 업무가 좋다고 주장하거나 미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한 달간 UX 플로우 기획 능력은 발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방면에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박람회 준비와 더불어 회사와 앱의 비즈니스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게 되니 앱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고유 철학을 더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인쇄물에 쓰이는 마케팅 라이팅을 통해 UX 라이팅에도 성장이 이루어졌다. 물론 박람회를 일 년에 두 번 세 번 넘게 하라 하면 기겁하며 도망 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하기도 싫었던 업무가 성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나와 같이 부수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전쟁은 끝이 납니다. 그 전쟁 속에서 우리는 다칠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 있죠.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살아남았어요. 전쟁을 하는 동안 뒤처진 것도 아닙니다.

왜냐고요? 다방면의 시야가 넓혀지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이 경험은 분명 언젠가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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