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가 해결된 뒤에야 보이는 새로운 과제들
아직 펌킨 스파이스 라떼를 한 잔도 못 먹었는데, 스타벅스에는 벌써 레드컵과 페퍼민트 모카가 등장했다. 시애틀의 하늘은 다섯 시도되기 전에 어두워진다. 겨울이 오면 사람 마음도 저절로 지난해를 돌아보게 되는데,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1월은 그 회고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Connect’ 시즌이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성과, 어려웠던 점, 다음 분기 계획을 한 번에 정리해야 하는데, 늘 첫 번째 난관은 똑같다. 6개월 전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 캘린더와 매니저와의 1:1 노트, 개인 스케줄러, Copilot까지 총동원해야 그나마 조각난 기억의 퍼즐이 맞춰진다. 프로젝트는 항상 여러 개가 동시에 굴러가고, 재택근무로 일하면 계절의 감각조차 묻히다 보니, ‘열심히 살았다’는 느낌만 남고 구체적인 장면들은 흐릿하다. 그러나 막상 평가서를 적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그 ‘열심’의 대부분이 사실 업무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불안에서 나왔던 것 같다는 점이다. 재택근무가 길어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한국식 사고방식이 묘한 압박으로 돌아왔다. 프로젝트가 끝나서 잠깐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불안했다. 자꾸 매니저에게 “더 할 일 없나요?”라고 묻게 됐다. 미국 생활 3년 동안 삶의 중심은 늘 신분 문제였다. 휴가를 내서 비자 서류를 준비하고, 고치고, 우편함을 수시로 확인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 터널의 끝에 작은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O-1A 비자는 OPT가 끝나기 며칠 전에 승인됐고, 영주권도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다. 당연히 벅찬 기쁨과 후련함이 밀려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마음은 잔잔했다. 아마도 신분이 해결되면 큰 변화가 생길 거라 기대했는데, 막상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저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던 바위가 조금 가벼워진 정도였다.
하지만 달라진 것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는 회사에서 잘려도 미국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는다는 점. 그 작은 안정이 생기자, 그동안 덮어뒀던 질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럼 나는 이 회사에서 어떤 디자이너이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하반기 평가서를 매니저와 함께 리뷰하던 날에도, 익숙한 피드백을 또 들었다. “너 디자인 진짜 잘해. 그런데 그걸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할 것 같아.” 지난 3년간 다양한 사람들이 비슷한 피드백을 줬었다.
“팀원에게 피드백을 더 적극적으로 주세요.”
“누군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대신 떠안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해요.”
“본인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좀 더 공유해 주세요.”
솔직히 말하면, 일을 더 하는 게 훨씬 쉽다. 팀에서 경력도 가장 짧고,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내가 누군가에게 디자인 방향을 제시하거나 의문을 던지는 일이 아직도 주제넘게 느껴진다. 질문을 하면 “뭐 저런 걸 물어봐?”라는 반응이 자연스러웠던 곳에서 온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내 프로세스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 낭비로 비치지는 않을까 아직 두렵다. 비자는 이런 내 단점을 ‘에너지 부족’ 탓으로 돌릴 수 있는, 편리한 핑계였다. “지금은 신분이 급하니까…”, “오늘은 힘드니까 다음 회의에서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 이렇게 하루씩 넘기다 보니 몇 달이 가고, 몇 년이 갔다.
미국 대기업에서는 일을 많이, 잘하는 것보다 ‘존재감’이 먼저다.
여기서도 직장인이 부딪히는 벽은 대부분 하드 스킬이 아니라 소프트 스킬이다.
생존이 해결되면 비로소 성장이 시작된다.
얼마 전 선배 디자이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취직하고 신분 문제 해결되면 끝일 줄 알죠? 그다음이 진짜 고난이에요. 인생은 원래 고난의 연속이에요.” 그 말이 요즘 더 크게 와닿는다. 생존의 고난이 끝나니, 이제야 진짜 삶의 고난이 시작된 것 같다. 미국 대기업에서 ‘팀에, 회사에 기여하는 디자이너’, 목소리가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숙제를 받았다.
다음 글부터는 비자와 영주권을 준비하던 시간들, 미국 테크 회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로서의 고민, 그리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성장했던 순간들에 대해 차근차근 적어보려 한다. 나의 생존에서 성장으로 넘어가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힌트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