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자이너 정 May 29. 2023

자고 일어났더니 회사가 사라졌다면?

미국의 어린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들

미국 애리조나 주에 뿌리를 둔 fintech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Fintech는 financial technology의 줄임말인데 금융권 테크놀로지 회사들을 두고 하는 말로 통상 fintech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2022년 9월, 기존에 몸 담고 있던 회사의 사내 문화나 회사의 프로덕트 등에 불만이 많은 상태였는데 때 마침 채용 담당자에게 이직 생각이 있냐며 연락이 왔다. 기존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를 멈추고 출근을 요구하기 시작했었고 두 달 된 어린 강아지를 입양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무조건 재택 온리 (remote only!)라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곧바로 이력서를 다듬어서 보냈다.


시작한 지 5년이 채 안된 어린 스타트업이었고 지난 1년 동안 100명이 넘는 계약직원들을 고용하며 몸집을 키우고 운영해 오던 회사였다. 대부분의 풀타임 직원들은 계약직으로 시작해 6개월에서 1년 남짓 되는 사이에 정직원으로 고용된 경우였고 나 또한 이런 조건으로 푹신한 풀타임(정직원) 자리를 그만두고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회사의 핵심 프로덕트는 뱅킹 애즈 어 서비스 (BaaS, Banking as a Service)였다. 소프트웨어 애즈 어 서비스 SaaS, Software as a Service와 비슷한 개념으로 금융권 관련 회사나 은행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뱅킹 테크놀로지 설루션을 모듈처럼 자유롭게 기능을 추가하거나 빼어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다.


회사에서 나를 고용한 이유는 새로 시작하는 세금 공제 서비스 관련 이니셔티브(initiative) 때문이었다. 비록 회사의 핵심 서비스이긴 했지만 뱅킹 서비스는 개발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로 디자인도 전면적인 리프팅이 필요했고 웹스터 은행의 투자를 받아 파트너들을 찾고 온보딩 하는 단계로 재정적으로 그렇다 할 큰 수익이 발생하고 있지 않은 단계였다. 2020년 발 코로나 위기를 맞이하여 미국 정부에서 회사들이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급여를 지급하는 것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ERC (Employee Retention Credit)이라는 세금 공제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2-3년의 짧은 시간 동안 ERC 프로그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소규모 기업들을 상대로 자동화된 세금 공제 서비스를 상품화하여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 회사의 목표였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세금 공제 서비스 일에 막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을 때로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디자인 관련 asset이나 framework들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컴퓨터와 일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지원받고 온보딩이 끝나자마자 바로 지난 몇 달 간 ERC 관련 업무로 쌓여있던 서류들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미팅 때는 이 상품이 잘 완성됐을 때 가장 이상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타겟으로 잡은 고객층은 누구인지, 꼭 필요한 정보나 세금 서비스 관련돼서 질문이 있을 때는 어느 곳에 자문해야 하는지 등등 궁금했던 내용들이나 혼자 서류들을 읽어보면서 헷갈렸던 것들을 되짚어 확인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스타트업답게, 그리고 프로덕트도 너무 이른 단계였기에, ERC를 관리하는 프로덕트 매니저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로드맵(product roadmap)이라던가 디스커버리(discovery) 등 프로덕트 매니저의 역할도 같이 소화해야 했다.


세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론칭이 목표였다. 아무런 시각적인 자원이 없이 계속되는 미팅은 과연 사람들이 같은 아이디어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게 추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갭을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새 상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생긴 후에는 바로 디자인에 들어갔다. Lo-fi wireframe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흑백 톤과 텍스트 대신 placeholder를 사용하여 내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플로우를 만들었다. 덕분에 ERC 일에 모멘텀(momentum)이 생기고 같이 의논하던 팀원들의 얼굴에 생기가 돋았다. 마케팅, 비즈니스, 프로덕트, 개발팀 할 것 없이 모두 내가 제공한 피그마 파일에 들어가 살펴보고 피드백을 주며 구체적인 개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Agile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정해진 2주 간격의 스프린트(sprint) 같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피드백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업데이트했고, 개발팀 리더와 매일 아침 sync meeting(일의 진행 상황과 현황을 공유하기 위한 미팅)을 하며 현실적이고 구현 가능한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스타트업이니 만큼 나를 딱 붙어서 관리하는 매니저가 없었고, 프로덕트 오너와 개발팀, 그리고 일에 필요한 모든 부서와 알아서 대화하며 일거리를 찾아서 해야 했는데, 이런 환경이 오히려 자칫 산만하고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나에게는 최적의 일터였다. 당장 수익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은 사업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있던 최고의 인재들이 다 이 쪽으로 투입되었고 덕분에 나는 구글과 멕킨지 등 내로라할만한 회사들에서 오랜 업무를 하고 큰 사업들을 다뤄봤던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일을 하게 되었다. 그분들의 소통 방식이라던가, 문제 해결 능력, 일의 중요도를 결정하고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prioritization, 긍정적인 마인드를 옆에서 보고 들으며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읽은 어느 책보다도 더 큰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세금 서류와 지원 관련 과정에 대한 자문을 구한 건 EY로 더 잘 알려진 언스트 엔 영 (Ernst & Young)으로 Big Four라고 불리는 세계 4대 회계법인 회사 중 하나이다. 매주 두 시간가량 되는 시간, EY 쪽 직원들과 프로덕트를 리뷰하고 ERC 세금 공제 관련 다양한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빠른 시간 내에 ERC와 기타 세금 공제 서비스에 대해 문외한이던 나는 두 달 만에 준전문가가 되었고, 무엇보다 EY라는 대형 펌의 시스템을 알아가면서 놀라운 배움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바쁜 세달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ERC Digital 이라는 이름 하에 론칭을 하게 되었다. 몇천명 대의 organic user가 생겼고 마케팅 사이트에서 유입되는 유저도 상당했다. 세금 서비스 제공사와 파트너쉽을 맺으면서 30,000명 이상의 세금 전문가(tax preparer 혹은 CPA)들을 지원하는 대쉬보드(dashboard)를 연이어 개발했고 이 세금 전문가들은 한 사람 당 한개에서 스무개 사이의 어플리케이션을 관리했다. 회사에서도 ERC 개발 진행상황에 힘입어 몇십억원 상당의 시리즈 B, VC 펀딩에 성공했고 그보다 더 작은 소규모의 투자자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였다. 약속 된 VC 펀딩은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나고 계약서 싸인이 마무리 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행방을 알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기대하고 있던 투자금이 들어오지 않자 회계쪽으로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투자금이 들어오면 바로 나의 정직원 공식 채용을 시작한다는 얘기에 들떠있던 나도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달 간 회사 내 모두가 펀딩의 행방에 귀를 쫑긋 세우며 긴장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뉴스에서 실리콘밸리뱅크가 파산 위험에 쳐해있다는 뉴스가 들리기 시작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다 사용하는, 스타트업들을 상대로 niche market을 겨냥한 은행이였는데, 테크놀로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은행이었다. 심지어 내 커리어 초반에 같이 일을 도와줬던 스타트업 창업한 친구 한명도 실리콘 밸리 뱅크가 가장 먼저 선택한 뱅킹 파트너였다. 그 은행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부도 위기라니 너무 놀라운 소식이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 사태를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국의 은행들은 연방정부의 FDIC(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가 지정한 법에 따라 손님들이 디파짓한 돈의 10%의 금액은 항상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어야 하고, 그 말은 나머지 90%의 돈으로는 은행이 투자를 하거나 대출을 하는 등 은행이 자체적으로 돈을 관리할 수 있다. 이 돈 관리에 대한 자세한 규제는 FDIC 웹사이트(https://www.fdic.gov/)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방대한 내용임으로 설명은 삼가도록 하겠다. 코로나 펜데믹 기간동안 실리콘 밸리 뱅크는 평상시의 3배에 달하는 양의 디파짓을 받게 되었고, 은행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부는 대출로 내어주고 다른 일부는 securities(유가증권)에 투자했다. 보통 안전 자산으로 생각되는 securities는 federal reserve(줄여서 fed)에서 이자율을 급격하게 올리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높은 이자율에 많은 스타트업들은 자금 문제에 부딪혔고, 은행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양의 디파짓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디파짓을 충당하기 위해 미리 투자했던 bond를 팔아야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 결정에 은행은 엄청난 양의 금전적 손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수요일, 은행에서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식쉐어를 팔겠다고 발표했고 그로 인해 놀란 투자자들이 급하게 주식을 팔면서 은행의 주가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덩달아 놀란 은행 고객들도 너도 나도 디파짓을 인출해가면서 은행 발표 하루만에 약 420억달러의 돈이 빠져나가게 됐다. 같은 주 금요일 은행은 연방정부에 의해 압수당하고 정부에서는 고객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실리콘 뱅크를 포함한, 다른 은행도 압수하였다.


불행 중 다행히도 미국 역사상 두번째로 컸던 실리콘 밸리 뱅크 금융위기는 잘 넘어가고 정리되는 듯 하였으나, 이 사태로 타격을 입은 파트너사 한군데의 운영 잠정 중단과 누적된 VC 펀딩 부재에 우리 회사도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처음 실리콘 밸리 뱅크 뉴스를 접했을 때는 놀랍기도 하고 우리 회사는 실리콘 밸리 뱅크와 거래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코워커들과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앞으로 알 수 없는 기간동안 모든 operation을 종료한다는 이메일과 함께 하루아침에 나의 일자리가, 회사가 사라졌다. 황당한 전개에 웃음이 나왔다. 같이 일하던 한 코워커와는 하루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앉아 서로 하소연을 하고 위로를 주고 받았고, ERC 팀에서 같이 일했던 핵심 멤버들과는 단체 영상통화를 하며 각자 와인을 한병씩 가져와 술과 함께 착잡한 심정을 공유했다.


스타트업은 job security가 역사가 길고 덩치가 큰 대기업들에 비해 낮은게 현실이다. 보통은 급여도 비교적 적은 편이고 IPO를 기대하며 받은 주식으로 연봉 조율을 하는것이 일상적이다. 하지만 한 회사에서 신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보람을 느끼며 다음 사업을 추진하던 중에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경우의 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것 같다. 주변 친구들도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사가 없어졌다고?" "말도 안돼" 같은 반응이 대부분이였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짧지만 짧은 7개월간의 시간동안 나는 참 많은 걸 배웠고 너무 많이 성장했다. 디자이너로서 나의 정체성과 나의 강점과 약점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은 1-2년에 한번씩 이직하는 게 별로 희안한 일이 아니다. 되려 연봉 협상을 잘 해서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장려하는 분위기이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골치 아픈일이다. 내가 이 회사에 있을 때에도 정직원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인터뷰를 봤는데 오퍼를 받았던 것이다. 직원 복지도, 급여도, 여러 방면에서 더 좋은 조건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에 남기로 결정했던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 즐거움, 보람참도 있었지만,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직장 동료들 덕택이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내 보스였다. 내 바로 직속 상사였던 프로덕트 오너는 회사 밖에서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고 그 어떤 것보다 나의 회사 안팍 모습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지원해주었다. 내가 막걸리 빚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막걸리 사업을 하고 싶다고 던진 말에 스타트업 관련 네트워킹 모임을 직접 데리고 가서 사람들을 소개 시켜주시기도 했고, 회사 내의 일에만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네 것을 찾아보라며 항상 격려해주셨다.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 더 배운것은 회사가 employee tenure를 높히기 위해 아무리 이벤트를 열고, 팀 빌딩 액티비티를 한다 하더라도, 직원의 입장에서는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의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매니저와의 관계에 따라서 이 회사에 남느냐 떠나느냐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나의 UX 디자인 커리어를 키워나갈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훗날 혹시라도 매니저의 자리에 서게 된다면 이 경험을 꼭 기억하고, 멘토로서 선배로서 나의 팀원들이 의지 할 수 있는 상사가 되고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