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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석을 타게 될 줄은 몰랐다. 비지니스도 못타봤는데 일등석이라니.
내가 탄 비행편은 인천-뮌헨 구간이고 약 12시간을 비행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일등석 가격을 검색해봤는데 대략 편도 400만원 정도.. 이정도면 파리 가서 에펠탑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푸아그라, 에스카그로, 샤토브리앙, 라따뚜이 먹고 스파 하다가 스위트룸에서 자고 올 수 있는 가격이다. 아니면 아이맥과 맥북을 산 뒤 일등석 체험기를 읽는다..
이륙 두 시간 전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코노미석 라인엔 머글들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30분은 족히 기다려야할 것 같은 긴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품위 있는 비니지스석이기 때문에 줄을 서지 않고 바로 탑승권을 구입했다. 직원이 비행기가 만석이라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설렜다. 격 떨어지게 꼭 해달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저 갈망하는 눈빛을 보내봤지만 무시당했다.
비지니스 티켓에는 항공사 라운지 이용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홋!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가봐야겠다.
근데 줄이... 다 좀 비켜줄래
겨우 수속을 마치고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에 도착했다. 둘러볼 시간이 10분 정도밖에 없었지만 한시간쯤 남은 사람처럼 여유롭게 쇼파에도 누워보고 음식도 먹어봤다. 어딘가에 안마의자도 있다고 하는데 못해봐서 아쉽다. 나오면서 교양 있는 비지니스석 고객 답게 뉴욕 타임즈를 집어 들었다.
드디어 탑승의 시간이다. 여느 때처럼 머글들이 이코노미 대기줄에 길게 서 있다. 나는 오른쪽으로 여유롭게 들어간다.
직원이 표를 검사하는데 기계에서 빨간 불과 함께 삐- 소리가 났다. 탑승 거부당하는 줄.. 갑자기 직원이 볼펜으로 내 좌석 번호를 쓱 지우더니 '1D'라고 써준다.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단다. 헐?! 너무 기뻐하면 촌티나니까 늘상 있는 일인 듯 덤덤하게 입장한다. 기품 있게.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내가 입고 있던 패딩을 옷걸이에 걸어준다. 당케슌.
일등석은 총 8자리가 있었다. 내 자리는 앞자리 중간이었다. 일단 의자가 엄청 크다. 가방을 놓아도 자리가 많이 남는다. 대략 일등석 한 자리가 차지하는 면적이 이코노미 6자리 정도 되는 듯 하다.
허세 충만한 상태로 비지니스석으로 간 뒤 크기를 비교해본다. 이코노미를 탈 땐 비지니스석이 커보였는데, 일등석에서 비니지스석을 보니.. 누가 낚시 의자를 여기 갖다놨어?
자리에 앉아보았다. 자리가 광활해서 다리를 뻗어도 다리 받침대에 닿지가 않는다.
의자의 왼쪽 손목 받침대에는 의자를 부위별로 디테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버튼들이 있다. 전공이 디자인이라 직관적이지 않은 UI가 매우 거슬렸지만, 교양 있는 일등석 탑승객 답게 웃으며 넘기기로 한다.
우측 손목 받침대에는 리모컨이 들어있다. 스크린에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리모컨을 이용하여 스크린을 조절해야 한다. 네모난 부분에 엄지를 대고 움직이면 화면에서 커서가 움직인다.
좌석 앞에는 여러 가지 구비품들이 있었다. 일단 제일 눈에 띄는건 리모와(RIMOWA) 캐리어 미니어처 같이 생긴 녀석. 열어보니 안대, 양말, 치약, 칫솔, 구두주걱, 로션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는 비행 동안 갈아입을 옷과 실내화가 있었다. 기모 처리 되어 있는 것이 따숩고 좋다.
헤드폰도 보스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착용하면 세상이 조용해진다. I believe I can fly~
드디어 식사 시간이다. 메뉴를 고르라고 한다. 한글 메뉴에서 골랐는데 예상과 다른 메뉴가 나와서 영어 메뉴를 봤더니 한글과 달랐다. 누가 번역했냐 이거
여튼 넓은 식탁에 승무원이 음식을 순서대로 준비해준다. 저 식탁은 내 쪽으로 당길 수 있다.
드디어 첫 스타터가 나왔다. 근데 이거 어떻게 먹는거임? 당황하지 않고 옆에 있는 아저씨를 게눈으로 흘겨본 뒤 똑같이 따라 먹었다. 안구운동이 자동으로 되네
다음에는 말로만 듣던 캐비어가 나왔다. 비싼거니까 흘리지 않게 조심스레 먹어봤다. 굉장히 고소했다. 위에 보이는 계란 노른지와 흰자 같은건 어떻게 막는지 몰라 이번에도 태연한 척 옆 자리 아저씨를 따라 먹었다.
세 번째 메뉴는 여러 가지 중에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연어를 선택했다. 안을 보니 게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
대망의 메인 메뉴 차례다. 나는 페스토 소스를 곁들인 소고기 볶음을 주문했는데 아래와 같이 나왔다. ^^ 한글 번역한 분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 기대하지도 않은 안심 스테이크를 먹었다. 미디움 웰과 웰던 사이 정도로 나왔는데 먹어보니 부드러웠다.
거한 식사가 끝났다. 이렇게 거창하게 먹어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무려 6차에 걸친 코스 요리였다. 사실 고급 와인들도 있었지만 술을 하지 않는 관계로 주문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글을 쓸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그랬다.
밥을 먹었으니 화장실에 가 본다. 일등석 화장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에비앙 페이스 미스트가 있고, 면도기와 면도 크림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 물론 화장실 앞에서 대기할 일은 없다.
참고로 이 화장실은 기장도 이용한다. 내가 맨 앞자리여서 기장과 눈인사도 했다.
배부르고 따뜻하니 이제 잠이 온다. 의자를 완전히 침대처럼 젖혀서 눞는다. 좌석이 넓어서 완전히 눞고도 공간이 많이 남는다. 일반 침대처럼 푹신하진 않지만 그래도 꽤 편하다. 양 쪽에 올릴 수 있는 칸막이가 있지만 나는 쿨하게 그냥 자기로 한다. 다 막아버리면 일등석 느낌이 안나니까
불이 꺼지고 누워보니 그제서야 지난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코노미석에서 허리 아파하며 잠도 못잤던 기억, 옆사람이 자고 있으면 화장실에도 못갈까봐 불안했던 기억 등.. 역시 밤이 되니 센티멘탈해진다. 자야겠다.
승무원이 식사 때 깨워주길 원하냐고 물어보길래 당연히 그래달라고 했다. 일단 빵이 나왔다. 빵은 계속 리필을 해주는데 여러 가지 빵 중에 고를 수 있다.
내심 거한 식사를 또 기대했지만 이번엔 좀 가벼운 식사 (메뉴판 오른쪽)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 하나만 고르면 왠지 아쉬워서 두 개를 골랐는데 다른 일등석 손님들도 다 두개를 골랐단다. 세 개 고를걸
첫 번째 요리는 각종 치즈와 햄이 있는 플레이터를 골랐다.
두 번째 메뉴는 아스파라거스 크림 스프였는데 맛있었다. 따뜻한 국물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과일도 먹었다.
후아~! 이렇게 12시간의 일장춘몽같은 일등석 체험은 끝이 났다. 새해부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어 감사하다. 이제 다시 머글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녕 일등석. 꼭 또 보자. 기품 있게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