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짧은 글 03.
이따금,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하곤 한다. 어떻게 하면 귀여운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미리부터 상상하는 즐거움. 왜인지 이렇게 하면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만 같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아무 이유 없이 백화점에 가서 여성 부티크 층을 한 바퀴 돌며, 한참 동안 나이 들어 보이는 옷들을 구경한다. 대부분 색이 엄청 화려하고 꽃무늬 패턴이 가득한데 거기에 반짝이는 큐빅까지 잔뜩 붙어 있어 속으로 엄청 깜짝 놀라기 일쑤. 이 혼란스러운 부티크 옷들 가운데 매우 단아하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귀여운 느낌이 나는 옷을 발견할 때면, ‘이다음에 할머니가 되면 꼭 저런 스타일의 옷을 입어야지.’라고 미리부터 생각한다. 저런 스타일의 옷이라 하면, 종아리 아래까지 덮는 길이감에 아래쪽이 넓게 퍼지는 치마 모양이 대부분. 그런 치마라면 원피스건 투피스 건 상관없다. 목선과 손목 선에 잔잔한 레이스가 달린 카디건은 필수.
이런 것도 있다.
우연히 모자가게에서 꽃 장식이 달린 마음에 드는 모자를 발견했지만, 그 모자를 쓰기엔 내가 아직 너무 젊다. 그때엔 ‘이다음에 할머니가 되면 꼭 저런 스타일의 모자를 써야지.’라고 또 미리 생각한다.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할머니가 된 나는 계절에 관계없이 늘 모자를 쓰고 있다. 꽃장식보다 리본 장식을 훨씬 좋아하지만,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보다야 꽃장식이라도 있는 것이 낫다. 클로슈 스타일이 제일 좋지만, 베레모 스타일도 괜찮다.
이런 것도 있다.
할머니가 되면 명품백 하나 정도는 들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명품 매장을 지나칠 때면 괜한 곁눈질로 가방을 쓱~하고 둘러본다. 귀여운 원피스와 모자에 어울릴법한 귀여운 할머니표 가방을 미리 구경한다고나 할까? 귀엽지만 우아한 느낌이 나야 하는 가방이라면, 보테가 베네타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귀여운 할머니로 늙어 보테가 베네타 매장을 들락거릴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그래서 미리 이런 준비도 해두었다.
몇 년 전, 영국 런던에서 할머니가 되면 쓸 요량으로 지팡이를 하나 샀다. 내가 쓸 것이니, 내 키에 딱 맞는 것으로 골랐다. 이 얘기를 들은 모두가 웃었고 모두가 어이없어했지만, 나는 꽤 진지했다.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나로선, 마음에 쏙 드는 귀여운 모양의 지팡이 하나쯤 미리 사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팡이를 산 계기는 이렇다.
해외의 어느 한 회사가 꽤나 멋진 형태의 지팡이를 디자인했더랬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패션 아이템으로써의 지팡이. 때문에 그 지팡이는 디자인 잡지에도 여러 번 소개될 정도로 꽤 이슈가 되었는데, 그즈음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 갔다가 그곳 샵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지금의 내가 할머니가 될 나에게 지팡이를 선물했던 것이다. 멋 좀 부릴 줄 아는 귀여운 할머니가 꼭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팡이를 사둔 나를 보고 엄마는 말했다. “나이 육십 넘은 엄마도 아직 지팡이 짚을 생각을 안 하는데… 너는 젊은애가 대체 왜…(한숨)” 엄마의 한숨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단 걸 알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다양하지만 불확실한 어른의 모습을 꿈꿨지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기에 확실하게 귀여운 할머니의 모습을 꿈꿀 수 있다.
어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야만 할지도 모르는 ‘할머니가 된 나의 삶’.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운 할머니의 삶을 미리부터 꿈꾸고 싶다. 가끔은 누군가, “노후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어?”라는 뻔한 질문 말고, “너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고 물어봐주면 좋겠다. 그러면 활짝 웃으며, “나는 진짜 진짜 귀여운 할머니가 될 거야! 너는?”이라고 행복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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