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agazin 03. 손이 감정을 이기는 '무심의 경지'
살다 보면 돌부리를 만날 때가 있다. 휘청하면서 균형을 잡기도 하지만, 무릎이 깨져서 피가 나고 오랫동안 흉터가 가시지 않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균형을 못 잡는지 잘 넘어지는 아이였다. 군인이었던 큰아버지는 퇴역하고 낚시로 세월을 낚으러 가실 때가 아니면 늘 집에 계셨는데 나는 넘어질 때마다 엄마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큰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다. 절뚝거리면서 걸어간 나의 피나는 무릎에 ‘호호’ 불어주시며 빨간약을 바를 때면 큰아버지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꾸 이렇게 흉 져서 미스 코리아 못 나가겠다.”
매번 진지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던 큰아버지는 직업 때문인지 늘 말을 삼가시고 엄중하셨다. 그래서 몇 마디 하시는 말은 거의 집안의 법과 같았으니, 나중에는 진짜 '미스 코리아를 못 나가면 어쩌지?' 어린 마음에 걱정했을 정도로 그 말을 나는 그대로 믿었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언제나 그런 돌부리에 넘어질 때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욕심이 생길 때였다.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손 끝이 떨리는 때가 누구나 있다. 시간은 없고, 머리는 하얘지면서 바짝바짝 입이 말라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 활시위가 당겨져서 언제 화살이 날아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그 순간! 그럴 때는 항상 뭔가가 부족하고 부족하여 결국에는 나를 탓하게 된다. 이미 지나간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데도 현재에 있기보다는 자꾸 과거에서 서성거리는 그럴 때 말이다.
도공의 최고의 경지는 '무심'이다. 기술이 익어 어떤 순간에도 절로 되는, 손이 감정을 이기는 그때가 바로 '무심의 경지'다. 잘하려는 마음도, 어떤 대가와 결과도 넘어서는 손! 옛날에는 마음의 수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줄 알았다. 무심(無心) 아닌가? 하지만 손이 마음을 넘는다.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은 없다, 사람에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물이 없듯이. 연주회를 나가는 사람의 연습은 실전에서 떨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떨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손의 훈련이다. 어둠 속에서 써는 떡의 두께가 일정한 것은 밝음 속에서의 단련이다. 그래서 그런 시가 있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인해’
재작년 이맘 때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준비도 안되었는데 마음이 내키지도 않는데 욕심만 가득했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공부고, 배움이 아닌 것이 없다. 돌부리도 넘어짐도 깨짐도 피 흘림도 상처도 돌아보니 다 고맙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왜 빨간약 며칠 바르면 나을 그런 상처에 '미스 코리아 못 나간다'라고 그리 안타까워하셨을까?
“큰아버지, 큰아버지... 엉엉엉”
그렇게 운다고 ‘호호’ 불면서 빨간약을 무릎에 발라줄 큰아버지는 구순이 넘으셨고, 치매로 나를 알아볼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오십이 훌쩍 지났으니 '엉엉' 울 수도 없고, 아직도 흔들리는 마음을 탓하기 전에 손이라도 더 익혀야겠다. 무심의 경지로 갈 수 있는 손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