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회고 차원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재직 중인 회사에 2020년 신입으로 입사했고 벌써 4년째 다니고 있다(정확히는 3년 6개월째). 그동안 아는 게 너무 없어서 어려웠던 것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회사가 속한 산업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문제들도 많다.
문제가 많고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치명적이라면 해결해야지. 이미 잊어버린 것들도 많을 거고, 모든 문제를 나열하기에는 힘들 테다. 일단 일을 잘해보려는데 뭐가 이렇게 힘들까? 계속 이유를 찾다 보니 알게 된 것들, 겪게 된 것들 위주로 써볼 예정이다.
4년간 나를 좌절시킨 것들은 크게 네 가지였다.
1. 무지 無知
2. 무지에서 파생되는 외로움, 좌절
3. 경력에 대한 불안감과 무력감
4.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번아웃
나는 크게 4가지 분야에 대해 무지했다.
① 산업 (대기업 대상의 B2B 제품 특성, 건설 산업의 특성, 드론이라는 하드웨어의 특성...)
② 테크 지식 (스타트업/IT 기본 지식)
③ 직무 지식 & 개발자들과 일하는 방법 (경험 부족)
④ 직장인으로서 일하는 방법 (일을 진행시키는 방법, 요령을 배울만한 경험 부족)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10명 정도 규모의 초기 스타트업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은 있었고, 난 건설이나 테크 쪽 지식은 하나도 몰랐지만 '앞으로 알아가며 일하면 되겠지', '다른 분들을 빨리 따라잡아야지'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도 꾸역꾸역 공부해 가면서 버텼었다.
이 회사가 이 산업군에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건설은 워낙 노동집약적 산업 (일반적으로 다른 생산요소에 비하여 노동력을 상대적으로 많이 투입하는 산업)이라 기술자들의 노하우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되는 현장의 일이기도 하고, 안전이 관련된 중요한 일이니 최대한 사고가 나지 않게 보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다.
그런 산업 특성 때문에 우리 회사가 잘 모르는 애송이들 취급을 많이 받았더랬다(사실 건설 전문가들이 아니라, 건설 분야에서 겪는 문제를 기술로 풀어보고자 하는 기술자들이라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이건 우리가 계속 고객과 사용자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고질적인 문제와도 관련 있었다. 내가 직무 지식이라도 갖춘 상태였다면 '리서치가 필요하다'든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일의 우선순위를 높여야 한다'든가… 필요한 걸 얼른 깨닫고 동료들을 설득하기 훨씬 수월했을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냥 신입이라서 불편함은 느끼는데 해결책에 대한 감은 없어 답답함만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직장인으로서의 경험도 부족하니 일을 진행시키고는 싶은데 누구의 의견까지 얼마나 수용해야 하는지, 언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아 고생도 꽤 많이 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나 같은 인하우스로 디자이너와 가까이 일해 본 동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로 어디까지가 본인의 역할인지 모른 채로 일했더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입사 초기에는 '나만 잘하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위축된 모습을 많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입사 초반은 그렇다 쳐도 1년이 지나도록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 같았고 그런 시기가 매우 오래 지속됐다.
1에서 언급한 여러 분야의 지식과 감각을 동시에 마구 익히려니까 스스로 체감하는 성장 속도는 너무 느렸고 답답했다. 겉에서 보기에는 빨리 배운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속도와 업무 퀄리티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산업에 대한 지식, 그에 따라 경쟁 서비스에 대한 지식도 없으니 뭔가를 디자인할 때 레퍼런스 삼을만한 걸 찾기도 정말 힘들었다.
동료들은 계속 내게 '잘하고 있다', '너무 좋아졌다'라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계속 내 상상만으로, 또는 하라는 대로 디자인해도 되는 걸까?라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인정과 응원 말고는 내가 들인 시간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B2B, 대기업 대상인 만큼 사용자와 디자이너의 거리가 너무 멀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1인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이런 고충과 불안감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처음에는 내 직무 지식이 늘면 뭐라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닥치는 대로 컨퍼런스를 신청해 들어봤다. 우리 회사와 비슷한 산업군의 해외 서비스 컨퍼런스, 디자인 컨퍼런스 등등 회사 지원비를 이용해 몇 번이나 참여해 봤지만 정말 실망스럽게도 건질 건 많이 없었다.
실패와 성공 사례, 정보 공유로 서로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행사들이었지만 내가 정말 실무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을만한 힌트는 투자한 시간과 금전적 자원에 대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대부분이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지나치게 초보자를 위한 강의였거나, 그냥 본인들 자랑일 뿐이었다. 컨퍼런스를 여는 목적을 기업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기라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며 지내니까 내 행동반경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범위가 회사에 갇힌 채로 변화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 한계도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힌트를 얻어 가며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걸 못하고 있던 게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정말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만나면 뭔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그룹을 고르고 골라 2021년, SDA(SaaS Design Archive)라는 스터디에 가입하게 됐다. 일단 비슷한 디자인 직군 안에서라도 다른 회사 얘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레퍼런스를 쌓을 수 있어서 분명 실무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SDA 활동으로 얻은 것들은 많았다. 모임을 이끌었던 한지유 디자이너의 평소 리서치 습관을 통해, 어디에서부터 다른 SaaS 제품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활동 마지막에는 한 제품을 함께 분석하면서 각자 운영하는 채널에 글을 올리는 게 목표였는데, 덕분에 미루고 미루던 브런치 작가 신청도 하고 글도 올릴 수 있었다. 다른 제품을 많이 보다 보니 우리 제품에 매몰되어 있던 시야가 트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B2B 프로덕트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멤버가 꽤 있었지만, 우리 산업처럼 완전히 버티컬 하고 노동집약적인 특정 산업을 대상으로 한 프로덕트를 경험한 멤버는 딱히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회사 외부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정말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건 맞구나, 앞으로도 회사 외부에서 내 일을 공감받을 수 있는 일은 정말 드물겠구나 깨닫기라도 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내가 전반적인 비즈니스나 다른 스타트업들을 잘 알게 되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회사 외의 일은 일절 하지 않고 이 산업과 제품에 몰입해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다잡아본 적이 있었다. 비즈니스 직군의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나도 그런 걸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2022년, 프로덕트 세계라는 다양한 직군이 모여 기업과 제품을 리서치하는 스터디 그룹에서 다시 멤버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찾아 바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프로덕트 세계에서는 다양한 산업을 알아가고, 기업이 가야 할 방향과 제품을 통해 그를 유추하는 리서치 과정을 배울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자발적으로 열리는 독서 모임에도 자주 참여해서 그동안 혼자 고민해 봤던 문제들이 우리 회사가 속한 산업 분야나 영업 구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막연히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혼자서도 문제 정의를 위해 패턴을 그려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큰 소득이었다.
다만 프로덕트 세계에 들어가고 보니 대부분이 창업을 준비하고 있거나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 네트워킹에 활발한 사람들이었던 게 예상했던 것과 다른 점이었는데, 지금은 네트워킹 행사에 많이 참여하진 않지만 활동 초반엔 아직 내가 일하는 회사가 속한 산업과 제품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설명할 일도 많았다.
디자이너인 내가 제품을 사업에 대한 이야기까지 외부에 설명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몇 번 얘기하다 보니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우리 제품이 뭔지 이해시키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분야는 건설에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안에서 생기는 복잡하고 다양한 니즈를 뾰족하게 타겟팅하지 않고 커버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는 게 많아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들이 마법처럼 사라지진 않는다.
이런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는 아마 우리 회사에서 고객과 사용자 리서치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일단 그때는 회사 멤버들이 '우리가 여러 고객사에 요청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회사 내부에서의 우선순위도 굉장히 낮았다.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대기업 대상의 제품이었기 때문에, UX가 흥미롭고 극단적으로 편리하지 않아도 '위에서 쓰라니까 쓴다...'같은 생각의 일반 직원들이 최종 사용자이고, 그들은 불편함을 이유로 '당장 이탈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당장 돈을 벌어다 주는 것들(요청 기능 개발, 영업)에 비해서 고객과 사용자들에 대한 리서치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투자에 가까웠으며(게다가 리소스가 많이 들 거란 생각이 드는...), 그때 나는 이 우선순위를 바꿔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만한 '명확한 근거'도 찾지 못했더랬다.
이런 현상을 패턴으로 인지하고 동료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언어화하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이 문제가 마치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라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도 문제 정의를 끝내자마자 PO 리더와 영업팀장님께 각각 말씀드려서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지 논의해 보는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건 또 다른 글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 모임은 시작일 뿐 아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3명이 모여 우리 회사가 가진 고질적 문제들을 나열하는 데만 해도 기력이 상당히 소모되는 일이었다.
나는 내 경력을 증명할 수단이 풍부하지 않다. 회사 외부에서 보면 내가 하는 일은 너무 생소해서 이 산업과 니즈를 이해시키는 것부터가 큰 난관이다. 그렇다고 제시할 수 있는 수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회사는 정량데이터 드리븐 회사가 아닌 데다 데이터를 모으기엔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제대로 된 데이터 분석을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디자인을 바꾸었다고 사용자들의 행동이 크게 바뀌어 티 나는 분야도 아니다.
주변 디자이너들을 보면 어떤 개선을 통해 매출 N%를 증가시키는데 기여했다든가, 유저 데이터를 분석해 인사이트를 얻어서 개선했다든가, 비주얼 퀄리티가 높아 호감도 있는 UI를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든가, 애니메이팅을 휘황찬란하게 만들었다든가... 뭔가 보여줄 게 많아 보이기도 한다.
우리 회사는 정성 데이터가 더 중요하니까(왜 중요한지 자세한 건 나중에 써보기로 하고) 필요한 인터뷰라도 기획하고 오퍼레이션을 시작해 보자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현장 인터뷰를 많이 나가보기도 했지만, 그걸 계기로 아직 뭔가를 개선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 결과는 없는 상태다.
나는 건설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될 계획은 없다.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최대한 다양한 산업을 경험해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기회도 원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B2C를 경험해보고 싶다고 한들 정말 할 수 있을까? 나처럼 버티컬 B2B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사람을 뭘 보고 채용하고 싶어 할까? 내 경력이 그들에게 매력적인가? 내가 정말 어떤 일을 했는지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1년 차일 때부터 나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B2B 디자이너들도 많겠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이런 불안감은 그동안 무엇이든 해결해 보려고 여기저기 많이 들쑤시고 다니는 원동력이 되긴 했지만, 직접 겪는 입장에서는 너무 괴로웠던 적이 많아서 같이 써본다.
위에 쓴 1번, 2번, 3번을 해결해 보려고 회사 내외부에서 이것저것 시도해 봤던 4년을 돌아보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시기와 끝도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시기가 번갈아서 찾아온 셈이었다. 입사 초반엔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도 정말 컸다. 적어도 내가 회사를 다닌 기간 동안에는 이런 조건이 번아웃이 오기 너무 쉬운 환경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앞서 잠깐 얘기했지만 디자인을 열심히 고민해서 해봐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느리더라도 뭔가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성공했고 실패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따라서 사용자에 대해 새로이 배울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래서 아무리 몰입을 하더라도 변화가 없는 제품을 보면 정말 무력함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악순환을 끊어보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보고 시도해 봤는데 '엄청나게 성공'한 건 아직 없다. 가설이라도 쭉 써보고 GA 클릭 이벤트라도 달아서 본다든지, 나중에 기능 회고를 해본다든지... 해보니 좋기는 했지만 만족할 수 있을만한 퀄리티는 전혀 아니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동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게 고무적이긴 하다.
힘들었던 점을 썼으면 좋았던 점도 같이 써야지!
다음에는 4년 간 버티컬 B2B 제품을 만들며 느꼈던 좋은 점들을 써볼 예정이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셔서 뻔한 내용이 아니길 바라며 다음 글을 얼른 써봤다.
사진: Unsplash의Maximalf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