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에 대한 환상과 편견

프로그래머라는 클리셰

by Eunice

수년 전에는 개발자에 대한 환상과 편견이 있었다.

- 광기넘치는 열정으로 하나를 파고드는 외골수나 오타쿠같은 타입
- 내향적이고 사람과의 관계에 어색하지만 머리가 똑똑한 너드
- 어둠속에서 빠르게 코드를 써내려가는 비밀스러운 해커, 은둔형 천재


이런 이미지로 느껴졌다.

특히 그 중 '광기넘치는 열정가' 스타일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단순히 취업 시장이 좋아서 개발자를 시작한 게 아니라, 직업이 아니더라도, 돈을 못 벌어도, 소질이 부족해도 '좋아하는 걸 꼭 만들어 내야겠다'는 강한 목적과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이런 열정은 단순히 기술이 아닌 일종의 예술처럼 낭만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누군가 노션이나 블로그에 프로젝트와 공부 내용을 정리해 두면 '정말 성실하구나, 대단하다' 하고 감탄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유니티 같은 엔진으로 인디 게임이나 모드를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더 멋지게 느꼈다. 그들은 돈보다 낭만을 위해 창작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대박이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작업이었다. 낭만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결과보다는 과정에 무게를 두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기에 더 특별해 보였다.


보안 분야처럼 접근성이 떨어지는 영역에 스스로 뛰어들어 독학하며 방법을 터득하는 사람들의 주도성도 인상적이었다. 웹 개발보다 훨씬 어려운 길을 혼자 개척하는 모습은 꼭 도전과 탐험을 주제로 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유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 좋아서 시작한 사람들의 최종 목표가 '은둔 고수 되기'는 아니었다. 단지 그 시절의 환경과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보이게 했을 뿐이었다. 나름대로 공부하며 커리어 전환의 기회를 탐색하거나 더 큰 도전을 위해 자신을 재정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 나뉘던 경계는 점점 흐려졌다.


또한 하나 더 깨달은 점은 좋지 않은 환경에서 홀로 길을 개척해 온 사람만 멋진 게 아니었다. 방향을 잘 잡아 교육을 받고 정석 루트를 걸어온 사람들 역시 진정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안정적으로 걸어온 길이 타인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결국 동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멋진 스토리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냥 한 번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자신만의 성취감을 느끼며 꾸준히 해낸다면 충분했다. 어쩌면 '대단한 동기'보다는 '계속해 볼 용기'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처음의 동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로 개발을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향적이거나 너드일 필요도 없고, 겉모습도 천차만별이다. 빠르게 목표를 설정해 주어진 길을 따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만의 템포로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함부로 우열을 나눌 수는 없다.


사실 편견은 조용히 스며들어 있다가 무심코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하나 더 약간은 우스갯소리로 언급하자면 나는 겉모습에도 편견이 있었어서, 너무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개발자 일을 하고 있으면 신뢰하지 못하거나 그 열정을 과소평가했지만 이 또한 말 그대로 편견이었다. '내가 깨닫지 못한 또 다른 편견은 뭐가 있을까?' 스스로 질문하기도 했다. 세상은 단일한 서사로 설명되지 않는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스토리를 쓰고 있는 중이다.


내가 처음에 개발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나는 20살 때 디지털 드로잉과 작곡을 취미로 삼았다. 그것을 이어붙여 나만의 비주얼 노벨을 만들었던 게 시작이었다. 좋아했던 걸 만들기 위해 혼자 배워 나갔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혼자여도 행복했던 그 몰입의 순간들, 결과와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의미 있던 시간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거창함이 아니라 나만의 리듬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길이 얼마나 특별한지 느끼는 순간이 오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면 된다. 멀리서 보면 그저 작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들이 모여 빛 한 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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