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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렬 Jul 15. 2021

하나님, 그리고 신은 존재 하는가

다니엘기도회 그리고 상처받은 치유자

믿음과 신앙에 관한 글을 쓴다는 건 여전히 내게 쉽지 않다. 난 아직 신앙적으로 아주 단단하지 않다. 보이는 것에 비해 실제 삶의 민낯은 더 부끄럽다. 그런 탓에 이번 일을 겪고 또 겪어 가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경험한 것들이 분명 있음에도, 어딘가에 이에 대한 직접적인 간증을 하기엔 나 스스로도 보는 이에게도 불편함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마음이 생겼다. 아니, 그렇다기 보단 도대체 머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사건을 두고 수 없이 많은 고민 끝에 정리가 됐다는 게 더 적절하겠다.


하나님이 정말 세상에 존재한다면, 인정하기 어렵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한' 것이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에게 일어난 이 일은 지금은 다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분명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아직 구체적이진 않지만 이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이를 통해 지금부터의 내 삶이 더 '가치 있다' 여겨지며, 내 입을 통해 '행복하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하루하루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난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란 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분께 받은 삶의 '소명' 일 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대로도 생각해 봤다. 하나님이 정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내는 어디 있는지부터 예측이 안 된다. 아내는 지금 행복한가? 이것도 모르게 된다. 천국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 나의 삶은 더 무의미하다. 아이들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다. 그저 나락이다. 이 모든 일들이 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안에 가득한 화로 주변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 화를 풀어야 할 방법도 실마리도 모른다. 그저 불평하고 좌절하다 겨우 버티며 살지 모른다. 내가 원했던 삶은 더더욱 아니다.


결국 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때때로 의심스럽고 원망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그저 나약한 인간이다. 다만 다시 한번 그럼에도, 그분의 뜻과 생각에 맞는 삶을 살아갈 때 내 삶이 얼마나 더 빛나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그렇게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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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이후로 지난해 10월 29일부터 아내가 떠나기 직전까지 매일 써 두었던 글들을 브런치에 남겨보려 한다. 그리고 아래 글은 그 기록에 앞선 서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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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생각보다 많은 방황을 했다. 다만 다행히도 나와 아내는 신앙 안에서 만났다. 그랬기에 아내의 병이 이미 많이 진행되었던 걸 알게 됐던, 2020년 10월 29일 그 시점에 믿음이란 게 조금이라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때까지의 믿음은 내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빠, 엄마, 외할머니, 신앙의 친구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 덕에 심긴 것이었던 것 같다.


그날로 아내가 떠나기 전까지 딱 한 달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한 달. 내가 느끼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 가까이 두시려 하는 것 같았다. 교육이자 훈련 같기도 했다. 왜 이렇게 조급하게 가르치실까 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불안함은 결국 현실이 됐다.


그 한 달의 시간. 내가 하나님께 받은 훈련에 두 가지 줄기가 있었다. 하나는 '다니엘기도회'였고, 또 다른 하나는 '이용규 선교사님'의 유튜브 말씀들이었다.


다니엘기도회는 몇 년 간 계속 진행되어 온 집회 겸 기도회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목사님, 선교사님, 그리고 여러 신앙인들의 고난과 극복, 치유와 사랑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우연인 듯 계획인 듯 마침 지난해엔 11월에 이 기도회가 시작됐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내게 한번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약 2주의 시간 매일 저녁 그 말씀들을 들으며 위로받고 인간의 삶에 주어지는 '고난'에 대해 묵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태어나 가장 어려웠던 한 달의 시기를 보낼 수 있었던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용규 선교사님은 십수 년 전 그분의 책 '내려놓음'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말씀을 듣게 됐는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음성을 듣고 이후 행동하는 법들과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됐다.  


다만 이런 한 달의 훈련이 있었음에도 지난 12월 5일의 일은 너무나 아팠다. 아팠다는 표현조차 부족할 만큼 내 삶을 뒤 흔들었다. '하나님. 도대체 왜요?'만 반복해서 외쳤다.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앞선 한 달의 훈련과 그 안에서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내 마음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그 한달의 준비가 없었다면 반년이 지난 지금 이 정도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 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벌써 6월이 됐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6월에 청년 다니엘기도회를 한다는 걸 봤다. 20-30대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과 기도회였다. 앞서 4,5월을 보내며 나는 이런 생각을 있다. 도대체 어쩌다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20대에 하던 고민을 다시 하고 있을까. 나는 평생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길을 찾아왔는데, 하나는 소명으로서의 나의 직업은 무엇일까 였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는 누구일까 였다. 30대 후반에 접어들며 이 두 가지를 찾은 것 같아 그래도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정과 육아에 전념하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동반자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이 두 가지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마흔을 앞두고 다시 청년의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또 우연인지, 계획인지. 이 청년 다니엘기도회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상처 받은 치유자'가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아픈 경험을 가져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 신이었던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의 아픔을 경험한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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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그 한 달을 겪으며 매일 써 온 신앙의 일기를 다시 펴 본다. 매일 죽을 것 같이 아프고, 심장이 당장이라도 멎을 것 같이 두려웠으며, 너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폭포같이 쏟아지는 그런 하루하루였지만, 나는 정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메시지를 통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기록들부터 이제 다시 적고 나누어 보려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지금을 살아가며, 또 앞으로 겪을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해 보고 싶다. 이를 통해 혹시라도. 누군가 내가 만나고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을 한 순간이라도 본다면. 이를 통해 그 삶의 가치를 다시 찾고 그 아픔을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같다. 만약 이 일이 아무 영향력이 없고 무가치하며 지승렬이란 사람의 삶이 이대로 망가지고 피폐해진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모두 다 같이 부정하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라면, 정말 나와 우리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라나, 사회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고, 누군가를 위로하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렇게 상처 받은 치료자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면. 어떨까.


두려움과 부담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언젠가 이를 읽는 당신 또한 아주 잠깐이라도, 하나님이란 사랑의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주길 기도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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