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월하노인
세상 모든 남녀의 혼인과 인연을 관장하는 신. 그는 수천 년 동안 인연의 서고(書庫)라는 거대한 장소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가늠조차 불가능한, 끝없이 펼쳐진 책장과 무한히 쌓인 붉은 실타래로 가득했다. 서고의 공기는 늘 정체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월하노인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독하고 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인간계에서 막 도착한 수백 권의 인연 장부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승민—김채영 재회.
박정우—최가희 엇갈림 후 3년 뒤 만남.
정지훈—이유진 운명적인 사고로 인한 연결.
노인의 길고 마른 손가락이 장부를 짚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의 눈빛은 초점이 없었다. 그의 손이 붉은 실타래를 기계처럼 능숙하게 쥐고, 탁자에 놓인 작은 붓에 붉은 묵을 찍었다.
슥, 슥.
붉은 묵이 칠해지고, 그 묵에서 뽑아낸 실이 곧바로 인간의 운명에 엮여 들어갔다. 그것은 단지 숙련된 노동일 뿐이었다. 감정이나 기쁨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마치 목수가 나무를 깎고, 장인이 흙을 빚듯이, 그는 그저 인연을 '생산'하는 일꾼이었다.
“다음.”
행복? 사랑? 영원한 운명?
월하노인은 천리안(千里眼)을 통해 방금 자신이 실을 엮어준 두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실이 엮이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조용히 웃었다.
'운명이 연결되었다.'
그들은 이제 고난을 이겨내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것이다. 노인은 이 극적인 순간을 수없이 보아왔다. 인간들에게는 꽤 감동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월하노인의 가슴은 차가웠다. 마치 수천 년 동안 눈보라가 휘몰아친 북극의 빙하처럼.
저들이 누리는 행복은 자신의 영원한 고독에 대한 보상인가 아니면 지독한 조롱인가?
그는 장부를 덮었다. 권태, 이 지긋지긋한 권태가 그의 영혼을 좀먹은 지 이미 오래였다. 인연을 엮는 이 행위의 결과로 발현하는 다른 이의 기쁨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영원한 결핍을 확인하는 형벌처럼 느껴졌다.
“나는 왜 나의 짝을 맺을 수 없단 말입니까.”
월하노인은 낡고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천장을 뚫고 닿을 수 없는 신계의 어둠을 향했다.
“저들에게 운명을 주고, 행복을 주는 자는 정작 운명도 짝도 허락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숙명은 언제 끝이 납니까?”
그는 침묵 속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과거에도 수없이 던졌던 질문들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신계의 거대한 침묵은 그의 질문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막은 그 어떤 대답보다도 명확한 거절의 확증이었다.
월하노인은 마른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온화했던 얼굴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와 배신감이 서렸다.
“좋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로 생을 지탱하지 않겠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앞에 쌓여있던 산더미 같은 붉은 실타래가 덜컹거렸다. 그는 그 실타래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서고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콰앙!
실타래는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며 다른 실들과 뒤엉켰다. 통제력을 잃은 붉은 실들이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서고를 뒤덮었다. 인연의 실타래가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것이다.
노인은 낡은 붓과 인연 장부도 내팽개쳤다. 이제 그는 월하노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랑을 갈망하는, 늙고 지친 하나의 영혼일 뿐이었다.
그는 신력을 사용하여 서고의 한쪽 벽을 갈랐다.
촤아아악!
벽이 갈라지며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인간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렸다. 통로 너머에서는 수많은 인간의 목소리와 복잡한 도시의 냄새 그리고 자유의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
노인은 자신의 흰 수염과 낡은 신복(神服)을 인간 세상의 평범하고 칙칙한 회색 겉옷으로 바꾸었다. 자신의 신력을 최소한으로 봉인하며, 그는 스스로 '사랑의 법칙을 모르는 평범한 노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통로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엉킨 붉은 실타래 사이로 인연을 기다리며 고독하게 떠도는 인간들의 명부가 보였다.
“미안하다. 나의 영혼을 팔아 너희의 인연을 짓는 일은 이제 끝이다.”
월하노인은 심호흡을 했다. 그의 낡은 심장이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이제 막 사랑을 찾으러 나서는 설렘인지 알 수 없었다.
이내... 통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