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를 통과한 후 눈을 떴을 때 그는 신계의 낡은 월하노인이 아니었다.
몸은 가볍고 눈앞의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찼다. 주변에서는 굉음이 울리고, 수많은 인간들이 작고 네모난 광판(光板)-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맹렬히 걸어 다녔다. 이곳은 서울의 번화가, 강남 한복판이었다.
월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수천 년 동안 늘어져 있던 흰 수염은 사라졌고, 쭈글쭈글하던 피부 대신 탄력 있고 매끄러운 살갗이 덮여 있었다. 옷은 서고에서 급히 갈아입었던 낡은 회색 겉옷이었지만, 그 옷마저도 새로운 몸 위에선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맞은편 가판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월하노인은 숨을 들이켰다.
압도적인 미남자.
신계의 마지막 작용이었을까. 그의 얼굴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완벽한 대칭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벅차올랐다.
“이것이 젊음의 얼굴인가.”
신력을 잃은 대가로 그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육신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의 눈에 인간의 붉은 실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엮어주지 않으니, 인연의 끈이 눈에 보이지 않는구나...”
그는 곧바로 깨달았다. 이제 자신은 운명을 꿰뚫어 보는 신이 아니다. 그저 이 복잡하고 낯선 세상에 떨어진, 잘생겼지만 가장 무지한 인간일 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신계에서는 느껴본 적 없던 내장을 긁는 듯한 불편함이었다. 그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섰다.
월하는 시원해 보이는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카운터에 내밀었다.
“1,200원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원?”
월하는 당황했다. 신계에서 물건의 교환은 신물(神物)이나 정기(精氣)로 이루어졌지 이렇게 종이 쪼가리나 금속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는 품을 뒤져 주머니에 있던 작은 금은보화를 꺼냈다.
“이것으로 되겠소? 신계의 은화(銀貨)요.”
아르바이트생은 월하노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넋을 잃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손님, 지금 장난하세요? 요즘 세상에 누가 이걸로 계산해요. 결제 수단이 없으시면 못 드립니다.”
‘결제 수단’이라는 낯선 단어. 월하는 굴욕감에 휩싸였다. 수천 년간 인연의 질서를 지켜온 신이 목마름 앞에서 무력하게 쫓겨나야 했다.
그가 편의점 문을 나서자, 아르바이트생은 핸드폰을 들고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방금 진짜 만찢남 왔는데 돈이 없대. 잘생긴 백수인가 봐.”
월하노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분 좋은 말은 아님을 직감했다.
배고픔을 이끌고 공원 벤치에 앉은 월하는 자신의 옆 벤치에 앉은 젊은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대화는 온통 '사랑'과 '만남'에 관한 것이었다.
“야, 너 그 앱으로 만난 애랑 어떻게 됐어?”
“아, 그 남자? 매칭률은 99%였는데, 만나보니 '스펙'이 좀 별로더라. 그래서 그냥 손절했지.”
“요즘 누가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대하냐? 통계적으로 매칭해서 빠르게 만나는 거지!”
월하노인은 경악했다.
매칭률? 스펙? 손절?
“붉은 실 대신 통계와 황금으로 맺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사랑인가?”
그는 신력을 잃었지만, 인연을 맺어주려는 본능만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직접 운명의 짝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함께 '이 세상의 사랑 법칙'을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대체 저 기계가 어떻게 운명을 엮는다는 말인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월하는 빌딩 광고 화면에서 발견한 '솔로들을 위한 미팅 파티' 광고를 따라 어떤 건물 앞으로 이동했다. 이 ‘미팅 파티’가 바로 현대인들이 붉은 실 대신 이용하는 인연의 현장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건물 입구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송운(宋運).
블랙 슈트를 입은 그녀는 시선을 클립보드에 고정한 채 무전기를 귀에 대고 사람들의 동선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웠다.
“김 팀장님은 4번 테이블, 박 부장님은 입구에서 3m 대기. 인원수 체크! 매칭 확률 90% 이상은 만들어야 합니다! 운명 따위, 기대하지 마세요! 이건 비즈니스예요!”
월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운명 따위 없다고? 인연의 신이 버리고 온 질서를 이 여인은 '확률'과 '비즈니스'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엮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에서 붉은 실은 보이지 않았지만, 신계의 붓질만큼이나 강렬한 '인위적 인연 맺기'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저 사람이다. 월하는 직감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집념. 어쩌면 자신의 짝을 찾으려면 저 인간의 사랑 법칙을 통달한 여인에게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배고픔과 문명에 대한 혼란을 모두 잊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요! 아가씨.”
송운은 무전기를 입에서 떼지 않은 채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월하의 얼굴과 마주쳤다. 송운은 순간 굳었다. 세상에 이런 얼굴이 존재할 수 있나. 그녀의 냉철한 이성이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곧바로 송운은 현실을 직시했다.
“죄송하지만 미남계는 다른 데 가서 쓰세요. 저희 파티는 외모보다 스펙과 매칭률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운명 따위는 없어요.”
그녀는 월하를 '운명을 믿는 잘생긴 한심한 사람'으로 단정하고는 냉정하게 그를 밀치고 다시 클립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운명이 없다고? 운명의 신 앞에서? 충격이었다.
천생미남으로 환생한 월하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외모가 통하지 않는 '운명 불신자'를 현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