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이라는 신성모독

by 일야 OneGolf

월하노인 아니, 이제는 ‘현생의 월하’가 된 그는 송운이 일하는 ‘퍼센트 매칭’ 결혼정보회사의 건물 앞을 맴돌았다.

여전히 배가 고팠다.

돈이 없는 그에게 잘생긴 얼굴은 호의를 얻는 수단이었을 뿐 생계를 유지하는 ‘스펙’이 되지 못했다.


​그는 송운에게 다가가 운명의 짝임을 주장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경고와 함께 던져진 종이 한 장이었다.


​“당신, 자꾸 이러면 경찰 불러요. 그리고 ‘짝’은 당신처럼 운명 타령하는 사람들이 찾는 게 아니라 ‘스펙’이 되는 사람들이 갖는 거예요. 이게 우리 회사의 매칭 기준이니까 자격 되면 그때 다시 오세요.”


​종이에는 빼곡하게 ‘회원 등급별 필요 스펙’이 적혀 있었다.


​[SKY 졸업장], [대기업/전문직], [부동산 보유 현황], [연봉 1억 이상]...


​월하는 그것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스펙? 신계에서는 덕(德)과 기품, 봉사가 스펙이었거늘. 인간은 종이 쪼가리와 금속으로 자신을 증명한다니... 신성모독이다!”


​그는 즉시 ‘스펙’을 얻기로 결심했다. 가장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직업’이라 판단했다.

​가장 먼저 그가 찾아간 곳은 길가에 붙은 ‘일일 막노동 모집’ 공고.

그는 힘쓰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신이었을 때는 달을 들고 은하수를 옮겼던 존재였다.
​현장 소장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이... 이거 배우 아닌가? 얼굴이 너무 낭비인데?”

​“저는 일을 하러 왔소. 하늘이 내린 인연을 엮는 일을 주로 했소만, 이제 잠시 이 땅에서 ‘연봉’이라는 스펙을 쌓으려 하오.”

​소장은 황당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비현실적인 외모 덕분인지 일단 작업을 허락했다.
​월하는 삽을 들었다. 삽질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삽을 들고 우뚝 멈춰 서서 하늘을 응시했다.


​소장 : “아니, 김 씨! 뭐 해? 일 안 하고!”


​월하 : “잠깐이지만 붉은 실의 기운이 느껴졌소. 저기 5분 뒤에 지나갈 저 청년에게 급히 운명의 실을... 아! 신력이 없지.”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장 : “미친 소리 말고 삽질해! 연봉이 아니라 일당도 못 받겠어!”


​결국 월하의 ‘직업 구하기’는 붉은 실에 대한 집착과 시대착오적인 발언 때문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는 다시 굶주린 채 송운의 회사 건물 앞에 주저앉았다.

​그때 송운이 잔뜩 지친 얼굴로 건물에서 나왔다. 그녀는 통화 중이었다.


​“네,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 분과는 ‘매칭률’이 1%도 나오지 않아요. 취미도, 직업도, 사는 곳도 완벽하게 안 맞습니다. 그냥 포기하시고 다음 분을 기다리시는 게...”


​송운은 전화를 끊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망할 운명 타령! 매칭이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거지, 왜 자꾸 억지로 운명을 찾으려고 해!”


​월하는 그 대화를 듣고는 송운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매칭률이 1%라고? 신계의 붉은 실이라면 그 1%의 틈으로도 충분히 인연을 엮을 수 있소!”


​송운은 짜증이 폭발했다.


“이봐요! 자꾸 운명 타령할 거면 당신 짝이나 찾으세요! 당장 눈앞의 현실이나 보시라고요. 당신은 스펙 제로예요!”


​“스펙 제로라니... 내게 신력이 있었다면...”

​월하는 절망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이 엮어주었던, '매칭률 0%'였으나 결국 세기의 사랑을 이루었던 커플'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니! 신력이 없어도 기억은 있지!”


​그는 송운의 핸드폰을 낚아채 고객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시오. 당신들의 인연은 취미도 재산도 엮이지 않소. 허나, 당신들의 가장 깊은 고독은 엮여 있소. 지금 바로 ‘달이 잘 보이는 한강 공원’으로 가시오. 당신들의 고독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순간, 인연이 완성될 것이오.”


​그리고는 뚝 전화를 끊었다. 송운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지금 회사 기밀 누설했어요! 당장 경찰에 신고...”

​다음 날 아침.

송운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녀의 팀장이 그녀에게 서류를 디밀었다.


​“송운 씨, 당신 어제 그 ‘매칭률 1% 커플’이 오늘 아침에 회사로 감사 편지를 보냈어.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난리야. 이 커플 덕분에 이번 달 실적 대박 났어!”


​송운은 믿을 수 없었다. 그 비현실적인 미남이 한 비과학적인 조언이 성공했다고?
​그녀는 곧바로 월하를 찾아냈다. 그는 여전히 건물 입구에서 굶주린 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당신! 어제 그 조언, 어떻게 했어요?”


​“나는 인연의 본질을 봤을 뿐이오. 당신들이 놓친 ‘고독’이라는 실타래를 엮어준 것이오.”


​송운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냉철한 사업가였다.

​“좋아요. 당신, 나한테서 ‘스펙’을 배우고 싶댔죠? 나는 당신의 비과학적인 미남빨과 엉터리 조언을 이용해 실적을 올리겠어요. 일종의 ‘비주얼 컨설턴트’ 혹은 ‘매력 조언가’라고 해두죠.”


​송운은 월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계약직 매력 조언가 월하]


​“대신 조건이 있어요.

첫째, 내게 ‘운명론’을 강요하지 말 것.

둘째, 현대 사회의 연애 법칙을 철저히 따를 것.

셋째, 밥은 주겠지만, 연봉은 능력에 따라 지급될 거예요.”


​송운은 말을 마치고, 가방에서 낡았지만 작동은 되는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 월하노인에게 던지듯 건넸다.


​송운 : “그리고 이건 업무용이에요. 당신은 이제 ‘도구’니까 도구를 사용해야죠. 비효율적인 행동 하지 말고, 이거 가지고 현대 사회의 ‘스펙’이 뭔지 공부하세요. 내일 아침까지 ‘연애 3일 법칙’ 외워 오세요.”


​월하노인 : (스마트폰을 받아 들며) “이것이 바로 ‘도구’... 송운 아가씨의 사랑 법칙을 담는 상자인가! 좋소! 받아들이겠소.”


월하는 벅차올랐다. 드디어 송운의 곁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스펙'의 기본인 '직업'을 얻었다.

이전 02화붉은 실 그리고 운명 불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