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위로가 돼주는 인생 드라마
내겐, 정신적으로 힘이 들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스무 살 무렵부터 잠들기 전 한편씩 보았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다.
제목과 노골적인 소재 때문인지 에로틱한 드라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이 드라마를 정주행 해 본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가 네 명의 여성 간의 우정과 인생을 그린 드라마라는 걸 알 수 있다.
섹스 앤 더 시티는 총 시즌 6편까지 이루어져 있는데, 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재미있고 사랑스럽지만, 그 중 단 하나의 에피소드만 꼽으라고 한다면 내겐 시즌6의 'One'이라는 에피소드가 단연 최고다.
삶이 지치거나 연애문제로 힘들 때, 이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나곤 한다. 오늘 밤도, 무의식적으로 나의 깊은 외장하드 속 'One' 에피소드를 눌렀다. 안정과 위로를 얻는 나만의 특별한 의식처럼…
에피소드 'One'의 내용은 이러하다. 과거 헤어진 남자 친구 스티브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미란다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미혼모지만 ―미국에서는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처럼 부정적이지 않다― 유능한 변호사로서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티브는 남자친구로는 재미있고 매력적이었지만,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완벽한 삶을 구가하는 그녀에게 남편으로는 어쩐지 철딱서니 같고 불안정했기에, 둘은 부부의 연은 쌓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그들은 각자의 연애를 존중하면서도 부모로서의 역할에는 최선을 다하는 쿨한 사이로 지낸다. 서로의 짝을 찾고, 아이도 잘 기르고 있는 미란다-스티브의 현실은 거의 완벽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미란다는 가볍게 데이트상대로 만나던 로버트로부터 진심 어린 사랑고백을 받게 되는데, 무슨 영문인지 고백에 화답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사실, 미란다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이자 아이의 아빠인 스티브를 아직 사랑하고 있었던 거다. 본인도 감정의 씨앗이 남아있다는 걸 모른 채 지내다가 뒤늦게서야 스티브에게 남은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된 것.
하지만 사랑이란 게 늘 그렇듯 타이밍은 야속하기 그지없고, 스티브의 곁에는 이미 다른 연인이 존재하는 상황. 하필이면 아이의 돌잔치를 하는 날, 스티브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데려온다. 이를 보고 미란다는 극도의 혼란스러움을 겪는다.
그러나 어쩌랴. 여자친구와 너무도 행복해보이는 스티브는 이제 가질 수 없는 상대인 것을. 어쩔 수 없이 미란다는 혼자 마음을 추스르며 아이의 생일 케이크 초를 켜기 위해 케익을 준비해둔 세탁실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때 스티브가 갑자기 세탁실로 들어온다. 스티브의 손에는 숫자 ‘1’이라고 쓰인 커다란 생일 초가 들려있었다.
“이거 봐 숫자 초야, 예쁘지?”
하고 마냥 해맑은 스티브를 보고 갑자기 멍해지는 미란다.
남편으로서, 아이의 아빠로서 멍청하고 능력없고 철딱서니없다고만 생각했던 스티브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사실은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미란다는 그런 스티브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사랑해”라고 말해버린다… 이제는 임자가 생겨버린 전 남자친구이자 아이아빠를 향한 뜬금없고도 어긋난 고백.
그런데 왠 걸. 사랑고백을 해놓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며 우는 미란다를 향해, 스티브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 뿐이야”
사랑한다는 간결한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이리도 묵직하고 강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정말 몇 번을 돌려봐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눈물이 찔끔 나는 킬링포인트다.
오랜 기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결국 서로의 길을 걷기로 했던 둘 사이에 끈질긴 사랑이 남아있음을 두 사람 다 깨닫게 된 순간,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구구절절한 설득보다 진실된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이해되고 설명되는 것은, 사랑의 근본일지도 모른다.
이 에피소드 이후 미란다와 스티브는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된다.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One,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변호사이기만 했던 미란다에게 스티브는 ‘멋진’ 남자는 아닐지언정, 내면에 잠들어있던 감수성을 꺼내는 지구상 유일한 남자였던 것 같다. 사랑의 힘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이 30분의 이야기.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를 통틀어 내게 단연 최고의 에피소드다.
생각해보면 그저 남녀의 지지고 볶는 사랑이야기일 뿐인데, 나는 왜 이리도 이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위안을 얻는 걸까. 미란다처럼 매 순간 아닌 척 강한 척 괜찮은 척하며 살다가 한 번씩 팡,하고 터져버리고 마는 그 순간, 머나먼 나라의 드라마 속 완벽한 여주인공도 실은 나처럼 몰캉한 사람이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스티브 같이 착하고 바보 같은 남자가 결국엔 미란다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에서 오
는 쾌락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됐던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이고 끄집어내 다시 내 눈물샘을 자극하곤 한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마법이 일어나니까.
나 아닌 누군가에게도 이 미드의 이 에피소드가 이렇게 힐링이 되었을까. 아마 나는 앞으로도 힘들 때마다 이 이야기를 서랍 속 초콜릿처럼 꺼내볼 것 같다. 영원히 닳지 않고 나를 위로로 적셔주는 초콜릿이길, 특별히 힘이 드는 오늘 밤, 바라본다.
2017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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