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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는 살 수 없다.

삐약삐약

초등학교 시절, 교문 앞에서 병아리를 팔던 할머니들이 있었다. 작지만 우렁차게 삐약거리며 살아 있음을 알리던 노란 솜털들.


기꺼이 500원이나 1000원을 지불하고 병아리들을 데려왔다. 하지만 며칠이나 몇주 사이에 병에 걸렸고, 이내 죽음으로 날 슬프게했다.


장성한 닭으로 길러본 건 딱 한번이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차갑게 식은 병아리를 마당 언저리에 묻어 주는 것이었다.


"병아리 사줘."


얼마전까지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내가 묻어 줬던 그 수많은 병아리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건가? 밤새 삐약거리는 소리가 싫다며 남편은 반대했다. 남편의 반대가 없었다면 난 아마 마트에서 유정란을 사고, 쿠팡에서 달걀부화기를 사 병아리를 깨어나게(?) 했을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해줬던 남편이 감사할 따름이다. 따뜻해지는 봄철마다, 개나리를 볼 때마다


"병아리 사줘."


노란 병아리가 연상될 때마다 난 병아리를 갖고 싶어했다. 내가 정녕 갖고 싶었던 건 병아리였을까? 아니면 유년시절의 추억이었을까? 그냥 노랗고, 작고,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병아리를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는 소유물로 만들어 버린 게 아닐까?


작은 생명은 누구의 것일까? 내가 샀던 건 병아리였을까? 500원으로 난 병아리를 살 수 있었을까? 마트에서 산 유정란을 부화기에서 꺼내면 그 병아리는 나의 것인가? 내가 만들어낸 것인가? 내가 낳은 것인가?


병아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일까? 병아리를 낳아 준 엄마닭?


엄마 닭의 허락을 받아야 병아리를 입양할 수 있는 걸까? 엄마닭은 달걀이라는 새로운 우주를 낳았고, 병아리는 그 우주를 깨고 나온 새로운 생명체다.


이 우주 어디에도 없었던, 새로운 생명체. 딱딱한 껍질을 연약한 부리로 깨고 나온,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세상을 한번 깨고 나온 대단한 생명체.


안온한 우주를 깨고 이 세상에 태어난 병아리.


병아리의 목숨은 병아리꺼다.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소유할 수 없는, 살 수 없는. 작은 몸집을 따라 500원으로 치부된 생명은 이 우주 어디에서도 다시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소유할 수 없다. 돈 500원과 비교도 안 되는, 살 수 없는 것.


생명의 고귀함.


노란색이 좋아서, 작고 여린 솜털에 귀엽게 날개짓 하는 게 좋아서. 어린 시절 나의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500원으로 난 병아리를 살 수 있었을까? 과연 외로움이 없어졌을까?


병아리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데 30년이 걸렸다. 생명을 사고 팔 수 있을까? 지금은 상상도 없는 식민지 시대의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 노예제도.


500원짜리 병아리는 누구의 노예였을까? 감히 내가 주인을 자청할 수 있었을까? 생각의 틀을 깨고 나오는데 30년이 걸린 내가. 감히 병아리의 주인이라고 자청할 수 있을까?



"삐약삐약"


병아리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


생산날짜 3월 31일. 일식조리기능사 준비때문에 산 계란이 아직도 남아있다. 냉장고 속 작은 계란이 생각의 뭉게구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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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는 귀엽다. 그냥 귀엽다. 소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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