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의 따뜻했던 가고시마
몇 년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형은 가고시마에 동생은 후쿠오카에 떨어져 살고 있는 어린 형제의 성장 스토리인데,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영화의 감성이 가고시마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책가방을 들쳐 멘 아이들이 총총 뛰어다니고 할머니는 살사 댄스를 추며 할아버지는 심심한 떡을 찌는, 가고시마의 그 소박한 풍경에 나도 젖어들고 싶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기대를 꺼내 들고 3박 4일 여정의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나를 가고시마로 데려다 줄 항공사는 제주항공. 프로모션 때 불굴의 의지로 17만 원 언저리의 왕복행 표를 끊어두었다. 제주항공의 가고시마 직항 비행기는 주 3회(화, 목, 토) 밖에 운행하지 않아서 무조건 휴가를 이틀 이상 써야 했는데, 심지어 새벽 6시 55분 출발이라 공항버스 첫 차로도 빠듯한 일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새벽 5시쯤 제주항공 탑승 데스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긴 대기줄에 마음이 초조해질 찰나, 어디선가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고시마 탑승 수속 곧 마감합니다!" 읭?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일단 황급히 줄을 빠져나와 창구로 갔다. 이른 수속 마감에 대해 (따지듯) 묻고 싶었지만 "지금 사람이 많아서 바로 들어가셔야 해요"라는 재촉에 수속을 마치자마자 곧장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탑승 시작을 10분을 앞두고 간신히 탑승 게이트에 도착. 새벽 비행기, 생각보다 빡세다. 식은땀을 닦으며 비행기를 탔다. 창밖의 일출을 보고 있으니 차츰 긴장이 가라앉았다. 인천에서 가고시마는 약 한 시간 반 정도. 다운받아놓은 영화가 슬슬 재밌어질 때쯤, 창밖으로 가고시마의 하늘이 나타났다.
가고시마 공항은 크기도 작고 사람도 없어서 빠르게 입국 수속을 마칠 수 있다. 시내로 가는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국내선 출구로 가는데 걸린 시간도 고작 3분. 운 좋게 출발 대기 중이던 버스에 바로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약 50분 거리. 굽이 굽이 산을 돌아, 일렬로 늘어선 낮은 주택을 지나,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뚜벅이의 여행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교통수단이다. 공항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교통 패스를 사기 위해 가고시마 추오 역 2층을 찾았다. 시내는 대부분 도보로 다닐 수 있지만, 센간엔이나 사쿠라지마항과 같이 걷기엔 먼 곳이 있어 웰컴 큐트 양일권을 샀다. 웰컴 큐트는 가고시마의 시티뷰 버스, 전차, 사쿠라지마 페리 등 관광을 위한 주요 교통수단을 묶은 패키지로, 일일 권이나 양일권을 살 수 있는데 양일권은 연달아 이틀을 써야 한다. 여기서 리빙포인트 하나, 가고시마 웰컴 큐트는 티켓 판매소가 아닌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사야 한다. 한국에서 예매한 이부스키행 타마테바코 열차 표도 미리 수령했다. 좋아, 이제 숙소 체크인만 하면 진짜 여행 시작이다-
3일 밤을 함께할 숙소인 도미 인 가고시마(Dormy in kagoshima)는 가고시마 시내의 최대 번화가인 센간엔 근처에 위치해있다. 주말을 낀 여행이라 숙박 가격은 사악했지만, 에어비앤비나 게스트하우스가 별로 없기도 했고 1일 1온천을 위한 과감한(!) 결정이었다. 결과는 완전 대만족- 퀄리티 좋은 어메니티에(심지어 호텔 안에서 입는 잠옷을 따로 주었고, 드라이기가 너무 좋아서 사고 싶었을 정도), 옥상에 작은 노천탕이 있어 여행 피로를 풀기에 최적이었다. 사실 가장 큰 장점은 30초 거리에 로손이 있어 간식 조달이 짱짱 용이했던 것.
숙소에 캐리어를 맡기고 한층 가벼운 몸이 됐다. 새벽부터 참아왔던 허기를 달래러 센간엔을 찾았다. 센간엔은 지붕 있는 대로에 상점이 줄줄이 늘어서있는 일본의 여느 평범한 쇼핑거리로, 오사카나 후쿠오카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단출하고 한산했다. 시골은 시골이었다.
첫 끼니로는 소문이 자자한 갸루후 라멘을 먹고 싶었는데, 구글맵의 정보와 달리 영업 시작 시간이 열두 시 반이었다. 구글 얼른 갱신해줘라 흑흑. 한 시간을 멍하니 기다릴 수 없어 근처의 우나기스에요시에서 장어덮밥을 먹기로 했다. 친절한 종업원 할머니는 메뉴판을 손으로 짚어가며 벤또와 덮밥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다. 같은 장어+밥 조합인데 굳이 장어의 위치를 다르게 해서 다른 메뉴로 파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보기엔 일어가 너무 짧았다. 양이 많을까봐 장어 2마리로 주문했는데, 먹다 보니 3마리로 시킬걸 살짝 후회했다.
후식으로는 시로쿠마 빙수를 먹으러 갔다. 시그니처인 거대한 흰 곰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가게 앞에 돈가츠나 우동 등의 메뉴들을 진열해놔서 도대체 여기가 빙수집이 맞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가게 안에는 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들이 사이좋게 1인 1빙을 하고 있었다. 빙수가 썩 작은 크기는 아닌데. 식문화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10개가 넘는 빙수 종류에 고민을 거듭하다 일단 시작은 시그니처로- 빙수 맛은 그냥저냥이었지만 젤리, 귤, 메론, 바나나, 쿠키와 같은 고전적인 토핑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중고딩 시절엔 캔모아에 가서 싸구려 빙수를 시켜먹는 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단돈 몇 천 원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빠방한 배를 안고 시내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시내나 슬슬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익히는 것이 첫날의 목표!(였으나 지금 보니 실패한 듯하다) 센간엔에서 10분 정도 걸어 나와 시립 미술관과 공립도서관, 각종 박물관이 모여있는 거리를 찾았다. 여행 가면 빼먹지 않고 들르는 곳이 박물관이나 전시관인데, 작가의 예술 세계나 작품의 의미를 통해 어떤 영감을 얻는다기보다는, 그저 일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하릴없이 멍-때리며 공상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에서도 종종 전시회를 찾곤 하지만, 도심 한복판에선 예술 작품도 급하게 봐서 체할 것 같을 때가 있다.
천장 조각이 굉장히 멋있는 시립 미술관은 작품 수가 많진 않지만 꽤 유명한 작가들의 알짜배기 그림이나 조각들을 만날 수 있고, 민속 박물관인 레이메이칸에선 각종 신기한 유물들과 함께 일본 역사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둘 다 웰컴 큐트로 할인받으면 삼사천 원 내에서 관람할 수 있고, 한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단, 튼튼한 두 다리를 미리 준비할 것.
몇 시간을 실내에만 있었더니 바깥공기가 간절했다. 햇살도 좋겠다, 가고시마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시로야마 전망대에 올랐다. 레이메이칸에서 전망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길 중간중간 뱀을 조심하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자동으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디선가 야경이 좋다는 후기를 봤는데, 가로등도 변변치 않아 밤에는 위험할 것 같다. 낮의 경치도 충분히 예쁘니, 혼자 가고시마를 찾았다면 시로야마 전망대는 꼭 낮에 가는 것을 추천. 적당히 가파른 경사에 슬슬 땀이날 무렵, 저 멀리 전망대가 보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쿠라지마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역시 힐링 치트키 대자연 짱짱.
지도로 볼 땐 거리 가늠이 안돼서 시간을 넉넉히 잡았더니 아직도 해가 중천에, 시간은 겨우 세시 반이었다. 숙소로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 아까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받은 관광 가이드를 뒤적거리다 시티뷰 버스의 노선과 시간표가 바뀌었음을 알게 됐는데, 마침 조금 뒤에 센간엔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 급(!) 일정을 수정했다. 전망대에서 조금 내려오다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슈퍼가 나오고, 그 근처에 시티뷰 버스 정류장이 있다. 3시 50분에 도착 예정이었던 시티뷰 버스는 4시가 살짝 안 되어 도착했다. (이것이 불행의 서막이었던가)
길가고 박물관이고 도통 사람이 없어 오늘이 주말인 줄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센간엔으로 향하는 버스는 주말 교통 체증으로 거북이걸음을 걸었다. 시로야마 전망대 정류장에서 센간엔까지는 버스로 약 35분 정도. 센간엔은 가고시마에 살았던 유명한 가문의 19대 후손이 지은 별장과 정원인데, 사쿠라지마가 잘 보이는 명소이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리니 급 허기가 져서 유명하다는 쟘보 모찌를 하나 사들고 산책을 시작했다. 쟘보 모찌라서 사이즈가 jumbo일 줄 알았는데, 모찌에 대나무 꼬치 2개가 꽂혀있는 모습이 무사가 칼을 찬 모습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짭쪼름하니 먹을 만했다.
겨울이라 다소 황량한 무채색의 정경이었지만, 잘 가꿔진 길을 걸으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봄여름에 오면 훨씬 더 생기발랄한 느낌 이리라. 곳곳에서 피고 있는 벚꽃들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설렜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엔 엄청나게 큰(!) 대왕 무가 있었다. 가고시마의 유명한 특산물이 고구마, 흑돼지, 무라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센간엔에서 가고시마 추오 역으로 돌아갈 때도 시티뷰 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웬일인지 정해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내 앞에 서있던 분들은 아마 1시간 넘게 기다리신 모양이었다. 해는 지고, 기온은 떨어지는데, 버스는 감감무소식.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일반 버스를 대여섯 대 보내고 나서야 시티뷰 버스가 도착했다. 심지어 갈 때도 교통 체증에 거북이걸음을 반복. 센간엔을 오가는 여정이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는지 버스에서 딥슬립을 해버렸다. 여기서 리빙포인트 하나 더, 시티뷰 버스를 탈 예정이라면 시간표를 너무 맹신하지 말고 여유 있게 일정을 잡을 것. 슬프지만 뚜벅이의 숙명이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아뮤플라자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뮤플라자는 가고시마 추오 역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백화점으로 우리나라의 현대백화점이나 신세계 백화점과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지하 1층엔 푸드코트와 음식점이 있고, 1~5층엔 각종 의류나 생활가전, 가구, 책 등을 살 수 있는 상점이 있고, 6층에선 대관람차를 탈 수 있다. 나는 지하 1층에 있는 카츠쥬에서 흑돼지 돈카츠를 먹었는데, 야들야들하고 기름진 맛이 근래 먹은 돈카츠 중에 제일 맛있었다. 나의 두 번째 힐링 치트키, 고기 짱짱. 그대로 가긴 아쉬워 푸드코트를 눈팅하다가 딸기 모찌 두 개를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향하는 길이라고 숙소로 바로 갔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 어김없이 로손 편의점에 들렀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까먹을 간식거리를 고르는데, 저어기서 신기한 콜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름하야 피. 치. 콜. 라. 뭐야... 이 거부할 수 없는 리미티드의 향기... 아사히의 사쿠라 리미티드 맥주와 함께 나란히 숙소로 모셨다. 아사히 사쿠라 맛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은은하게 복숭아 향이 감도는 피치 콜라의 맛은 넘나 인상 깊었다. 탁월한 혼종인 것(!) 피치 콜라 수입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며 첫 번째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