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의 청명한 가고시마
시끄러운 지하철에서도 세상모르게 꿀잠을 잘 정도로 어디서든 머리만 닿으면 쉽게 잠드는 나. 국경을 막론하고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탓에, 해외 봉사활동 중에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 친구들은 야심한 딥톡을 할 수 없다며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런 내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가고시마에서 악몽을 꾸다니. 온천에 개운하게 몸을 풀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포근하게 버석거리는 이불에 파묻혀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는데 말이다. 무슨 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우울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좋은 경치와 맛있는 음식이 내면의 복잡함까지 해결해주진 못하는구나. 사쿠라지마의 정기라도 더 많이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스르륵 다시 잠에 들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더 일찍 일어나서 요리미치 크루즈를 탔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한 악몽에 체력을 잃은 관계로 실패. 화산섬 사쿠라지마로 들어가려면 페리를 타야 하는데, 일반 페리와 요리미치 크루즈 두 종류가 있다. 일반 페리는 사쿠라지마로 직행하는 루트로 약 15분 정도 소요되고, 24시간 내내 15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반면 요리미치 크루즈는 사쿠라지마 섬을 순환하는 루트로 약 50분 정도 소요되고, 하루에 오전 11시 10분 딱 한 대만 운행한다. 둘 다 웰컴 큐트로 이용할 수 있으니 사쿠라지마를 들어갈 예정이라면 웰컴 큐트가 개이득인 것(!) 나는 아쉽게도 강제 일반 크루즈 행이 되었지만, 사쿠라지마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고 싶다면 요리미치 크루즈는 한 번쯤 타 볼만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11시쯤 숙소를 나서는데 생각보다 햇살이 따가웠다. 우와, 여긴 진짜 봄이네. 반신반의하며 챙겼던 선글라스를 쓰고 나니 완벽한 여행자 룩이 완성되었다. 오늘의 먹방은 라멘으로 시작. 가고시마 라멘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톤토로 라멘을 찾았다.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동네가 워낙 작다 보니 다 거기가 거기서 거기다.
생각보다 한산한 거리에 혹시 닫은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막 문을 연 모습이었다. 빨간 배경에 돼지 모양의 심플한 간판. 부지런한 몇몇 손님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라멘 맛은... 첫 입에서 오! 두 입에서 음- 세 입에서 하. 다 먹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육수가 남아있던 아침잠을 확 깨웠다. 흰쌀밥을 부르는 남도의 육수... 짠맛에 약한 나 같은 사람이라면 미니 덮밥을 같이 시켜먹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쿠라지마 페리 선착장은 덴몬칸에서 전차로 세 정거장 떨어져 있는 시야쿠쇼마에 정류장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따로 표를 끊을 필요 없이 직원분에게 웰컴 큐트를 보여주면 바로 페리에 탈 수 있다. 언젠가 인천 앞바다에서 탔던 페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다행히도 갈매기 떼는 없었다. 출발 시간에 빠듯하게 도착해서인지 전망 좋은 창가 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돌아오는 배를 기약하며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사실 아무 자리에 앉아도 사쿠라지마 엄청 잘 보임.
멍 때리고 경치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사쿠라지마에 도착해있었다. 어떤 건물에 사쿠라지마 방문을 환영하는 대형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센스 있는 사람이 번역해준 것인지 "허벌나게 반갑소잉~" 이라는 구수한 사투리가 떡하니 적혀있었다(사투리알못인 나는 지금 안 사실인데 "허벌나게"는 광주 사투리라고). 가고시마가 남도라서 사투리도 남도 버전인 것이라면 디테일 완전 인정.
사쿠라지마에 방문한 뚜벅이라면 꼭 타야 하는 버스가 사쿠라지마 아일랜드 뷰 버스다. 웬만한 도보로는 비지터 센터나 용암해안공원밖에 갈 수가 없기 때문. 사쿠라지마 아일랜드 뷰 버스는 유노히라 전망대를 포함한 사쿠라지마의 관광 스팟을 순환하는 버스로 한 시간에 한 대가 다닌다. 각 정류장마다 관광을 위해 3분~10분 정도 짧게 정차하는데, 하차 후에 다시 탑승하지 못한다면 한 시간을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타야 한다. 배는 24시간 15분 간격이면서 버스는 왜 한 시간에 한대만 다니나요 흑흑. 버스 대신 스쿠터나 자전거로 다녔다는 후기를 보긴 했지만 그럴 날씨도 그럴 체력도 아니었기에(이제 완전히 늙어버린 걸까)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1시 20분쯤 아일랜드 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는 만석이었다. 나는 다행히 자리에 앉았는데, 한번 엉덩이를 떼면 다시는 못 앉을 것 같아 웬만한 스팟에서는 내리지 않고 눈으로 감상하기로 결정했다. 차창으로 비치는 햇살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유노히라 전망대에 도착해있었다. 오오, 멀리서만 보던 사쿠라지마가 눈앞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곳곳에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이 보였고, 화산 꼭대기에 몽글몽글 피어난 구름은 아까보다 더 짙어진 것 같았다. 화산재가 날리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바닷바람에 다 씻겨갔는지 공기는 맑기만 했다. 어쩌면 버스에서의 낮잠 덕에 더 상쾌하게 느껴졌는지도. 이렇게 평화로운 사쿠라지마가 폭발하는 게 소원이었다니, 영화 속 주인공은 얼마나 간절했던 걸까 상상하며 사쿠라지마와 아쉬운 인사를 나눴다.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내려와 한 시간의 버스 투어를 마치고 다시 선착장으로 컴백. 용암해안공원의 족욕탕이 유명하다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선착장 앞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로손이 나오는데, 로손을 지나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마그마 온천이, 거기서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용암해안공원과 비지터센터가 나온다. 마그마 온천도 궁금하긴 했지만 귀찮아서 패쓰.
용암해안 공원에는 족욕탕이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는데, 사방이 뻥 뚫린 야외에서 신선놀음을 즐길 수 있다. 나는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앉았는데, 눈 앞엔 파란 바다가 펼쳐져있고 등 뒤엔 사쿠라지마가 든든하게 받쳐주는, 감히 배산임수의 정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주섬주섬 양말을 벗고 탕 속에 두 다리를 풍덩- 하려고 했으나 물이 생각보다 뜨거웠던 건 함정. 가만히 앉아 바닷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세상만사 복잡할게 뭐 있을까(!) 긍정 게이지가 무한으로 치솟았다. 악몽 따위 더 이상 내겐 없어-
피부가 적당히 빨개질 무렵 족욕을 마쳤다. 쪼그리고 앉아 발가락을 꼬물거리다 보면 선선한 바닷바람에 물기가 다 말라 따로 수건이 필요 없다. 비지터 센터로 가는 길에 무인 상자에서 귤을 샀는데, 굉장히 설익은 시골의 맛이었다. 이것도 기념이면 기념이라지. 비지터 센터에서 엽서 한 장을 사들고 다시 육지로 향했다.
육지로 나오는 배에선 야외 좌석에 앉았는데, 바닷물에 비치는 햇살이 정말 아름다웠다. 산, 바다, 해 이 심플한 세 가지로 무한 힐링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가고시마구나.
그대로 돌아가기엔 아쉬워 선착장 바로 옆에 있는 이오월드 수족관에 갔다. 한국에서도 수족관을 가본 적이 없어 두근두근 설렘(어릴 때 갔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것 같긴 하다). 난생처음 돌고래 쇼도 보고 각종 신기한 해양 생물들을 많이 보았다. 해파리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은 처음 알았... 옆에 있는 꼬마 친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와-를 연발했다.
이오월드 수족관 앞의 작은 하천을 따라 5분쯤 걸어 나오면 돌핀 포트가 나온다. 돌핀 포트는 파주 아울렛이나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처럼 고급 쇼핑몰, 음식점 등이 모여있는 거리다. 돌핀 포트 앞 공원에선 주말 행사를 마무리하는데 한창이었다. 무슨 행사였는지 궁금했지만 이미 철수가 거의 끝난 상태라서 알 수 없었다. 한 시간만 일찍 와볼걸. 일본 사람들이 뭐하고 노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게 못내 아쉬웠다. 아직 조명이 켜지지 않은 돌핀포트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아서 빠르게 가고시마 추오 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고시마의 자랑 중 하나인 흑돼지를 영접하기 위해 이치니산이라는 흑돼지 샤브샤브 전문점을 찾았다. 이치니산은 아뮤플라자 5층에 있고, 사람이 많을 때는 가게 앞 기계에서 순번대기표를 뽑아야 한다. 주말 저녁 버프로 40여분을 기다리고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나는 3,800엔 정도의 흑돼지 샤브샤브 코스를 먹었는데, 메인 샤브샤브에 각종 에피타이저와 미니 돈카츠, 디저트가 포함되어있다. 육수가 맑아서 심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깔끔해서 대-존-맛. 사실 나오는 족족 흡입해버려서(...) 정말 맛있었다는 느낌밖에는 딱히 적을 게 없다. 아, 하나 더 기억에 남는 건 디저트로 나오는 바나나 푸딩. 한 입 뜨자마자 느껴지는 생바나나의 달달한 육질에 그대로 행복해져 버렸다.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오늘의 마지막 코스, 대관람차로 향했다. 아뮤플라자 6층에서 탈 수 있는 대관람차에는 투명 칸 / 일반 칸 / 포켓몬 칸 세 종류가 있다. 나는 과감하게 모든 면이 통유리로 된 투명 칸을 선택(하고 꼭대기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바닥이 투명하게 보여서 그런지 멀리서 봤을 때보다 체감 높이가 훨씬 더 높았다. 얌전히 포켓몬 칸에 타서 포켓몬 인형이라도 끌어안고 있을걸. 나 같은 쫄보는 두 번은 못 타겠지만, 높이에 무던한 사람이라면 대관람차에서 조용히 가고시마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하루 여행을 마무리짓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조용한 가고시마에서 극강의 침묵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니. 대관람차와 함께 가고시마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