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 가고시마 (3)

2월 19일의 촉촉한 가고시마

by 자몽맛탄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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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스키로 가는 타마테바코 안에서


AM 9:10 일찍 채비를 마쳤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습기가 당황스럽지만은 않았다. 사실 이 날 비가 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뻔질나게 날씨 체크를 해댔으니 모를 리가 있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높아지는 강수 확률을 보며, 일개 인간의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날씨가 계속 맑았어도 좋았겠지만, 이미 청명한 사쿠라지마를 만난 지라 마음이 한결 가볍기도 했고. 뜻대로 안 되는 와중에 만나는 여행의 묘미를 기대하며, 두터운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검은 모래찜질과 노천탕이 유명한 이부스키. 영화를 보고 가고시마에 가고 싶어 진 것도 사실이지만, 비행기 표를 끊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해변가 모래에 파묻혀 자연과 혼연일체된 이부스키의 모래찜질 사진이었다. 오늘 하루는 누가 뭐래도 자연 속에서 푹 쉬어야지.



AM 9:58 조그만 과자 상자, 타마테바코

가고시마에서 이부스키로 가려면 열차를 타야 한다. 열차는 일반 열차와 테마 열차 두 종류가 있는데, 테마 열차의 이름이 바로 타마테바코다. 일본어로는 '특별한 선물 상자'라는 뜻이라고. 일반 열차에 비해 두 배 정도 비싼데, 딱히 그 값을 하는 건 아닐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지만(!) 한 번은 타봐야지 싶어 호갱을 자처했다. 나는 한국에서 웹사이트로 미리 예약을 하고 갔는데, 가고시마 추오 역에서도 표를 살 수 있다. 다만 하루에 세 대밖에 운영하지 않고 연휴나 주말에는 표가 빠르게 매진될 수도 있으니 나 같은 쫄보라면 미리 예매해두자.


교통수단이 자유롭지 않으면 시간이 금이 되는 법. 뚜벅이인 나는 가장 빠른 열차인 9시 58분 열차를 타기 위해 9시 반쯤 가고시마 추오 역에 도착했다. 전광판에 떠있는 출발 예정 표시를 보고 무심코 개찰구를 통과해버렸는데, 당연히 안 쪽에 편의점 하나는 있겠지라는 나의 예상은 무참히 빗나갔다. 개찰구 너머에는 말 그대로 대기 의자밖에 없기 때문에 열차 탑승 5분 전에만 통과하면 된다. 개찰구 너머 편의점만 멍하니 바라보다 빈 속으로, 빈 손으로 타마테바코에 몸을 실었다.


열차에서는 사이다, 푸딩, 초코파이 같은 간단한 주전부리만 살 수 있다. 그나마 시원하고 달달한 사이다가 남아있던 졸음을 청량하게 깨워주었다. 타마테바코 내부는 목재 느낌으로 따뜻하게 꾸며져 있고, 벽을 활용한 미니 서재와 창밖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갈 수 있는 편안한 의자들이 있다. 나는 앞을 보고 가는 좌석을 예매했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 비어있는 명당자리에 몰래 앉아갔다.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에 빗소리가 더해지니, 그 운치가 아주 좋았다.



AM 10:50 장대비가 내리는 이부스키에 도착했다.

두시간여를 달려 이부스키에 도착했다. 슬프게도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있었고, 관광안내소는 한국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모래찜질과 노천탕을 위해 헬씨랜드 가는 법을 물으니 친절한 안내원 언니가 버스 시간표와 안내 가이드를 챙겨주었다. 하늘은 흐리고, 빗방울은 굵고, 사람은 많고, 의욕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40여분을 달려 헬씨랜드에 도착. 얼른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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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모래 안에서


AM 11:45 꿈같았던 헬씨랜드 혹은 헤루씨란도

헬씨랜드 정류장에서부터 뻗어진 길을 따라 안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널찍한 운동장을 지나 한 건물로 들어섰는데, 아무리 봐도 매표소가 보이지 않았다. 사진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어서 당황할 찰나, 어떤 할아버지께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며 친절하게 매표소를 안내해주셨다.


산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곳곳에 모래찜질장과 노천탕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다. 걱정하지 말고 계속 킵 고잉 하다 보면 노천탕 건물이 나오고, 조금 더 걸어가 염전을 지나면 사진 속 긴 계단이 나온다. 거기가 바로 모래찜질장. 표는 노천탕과 모래찜질장 두 군데에서 모두 살 수 있다. 나는 먼저 모래찜질장으로 향했다. 비가 점차 수그러들더니 어느새 우산 없이 다닐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가는 길의 탁 트인 경치가 참 좋아서, 비 냄새를 맡으며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이용권을 사고 가운과 쪼리를 받아 탈의실에 도착. 모래찜질을 하려면 속옷까지 전부 탈의해야 한다. 나체로 하는 건 아니고, 세 번째 사진에 보이는, 저 빳빳한 가운을 입는다. 왠지 속옷 벗기가 망설여져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국 여자분이 "혹시... 속옷도 벗어야 하는 건가요?... 블로그에서 보긴 했는데 하하하"라고 물어보시길래 "그런가 봐요 하하하"라고 맞받아쳤다. 함께 하는(?) 탈의라 외롭지 않았다. 가운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으면 차례대로 순서를 불러준다. 그럼 쪼르르 따라가서 저 검은 모래 속에 폭-하고 누우면 알아서 삽으로 열심히 모래를 덮어주신다. 이때 머리에 모래가 닿지 않게 수건이 필요하니 꼭 수건을 가져갈 것. 없어도 100엔에 대여할 수 있다. 갑자기 스마트폰을 달라기에 뭐지? 했는데 모래에 파묻힌 내 모습을 다양한 각도의 사진으로 남겨주셨다. 차마 올릴 순 없지만(...) 작은 화면에 내 전신을 담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노력한 프로 정신이 사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모래찜질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진 않다. 나는 자리 운이 없어 해변가는커녕 바다도 안 보이는 2층 어딘가에 배정받아, 18명 정도의 사람들과 동시에 흙에 파묻혀있었다. 약간 모래 공장 같기도. 심지어 천막 사이로 빗방울이 자꾸 떨어져서 몸은 따뜻한데 코는 엄청 시렸다. 손발을 옴짝달싹할 수 없어 코가 근질근질해도 못 긁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좋았던 이유는 온몸으로 자연의 촉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자세로 누워 빗방울의 촉촉함을, 미세한 바람결을, 찰박거리는 파도 소리를, 손끝 발끝에서 느껴지는 모래알의 부드러운 까슬거림을,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몰입해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또 어디 가서 할 수 있으랴.





모래찜질에 반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노천탕 건물로 컴백. 아침을 제대로 못 챙겨 먹은 탓인지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구세주 같은 완전식품, 삶은 달걀(!) 무려 온천수로 삶은 계란이니 그 영양가가 두 배일 거라는 망상을 하며 계란과 탄산음료로 빈 속을 채웠다. 역시 목욕탕엔 삶은 계란이 진리라는 걸 가고시마에서도 깨달아버렸다.


달걀 먹방 뒤에 마주한 헬씨랜드의 노천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좋았다. 노천탕 몇 번 안 가본 노천탕 초보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넘모넘모 좋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과 같은 기분으로 목욕을 즐길 수 있다. 눈앞에 탁 트인 바다, 저 멀리 지나가는 통통배들,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온천 증기, 오른쪽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거대한 섬까지. 아직도 그 순간들이 꿈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좋았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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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2:10 이제 꿈에서 깰 시간, 이부스키로 컴백

모래찜질과 노천탕 버프로 이미 노곤해질 대로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왔다. 40여분을 달려 이부스키역으로 컴백. 아차, 돌아갈 기차 시간을 체크하지 않았었지. 방심했다. 당장 떠나는 기차는 가격이 두 배. 두 시간 정도 기다려 일반 열차를 타기로 했다. 마침 주변 식당들은 모두 브레이크 타임. 다행히 관광안내소 언니들의 도움을 받아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밥 다운 밥으로는 오늘의 첫 끼(!) 라멘과 편의점 과자로 지친 위를 달래주다 보니 어느새 세시 오십 분, 열차 출발 시간이 임박해있었다. 날씨가 좀 더 좋았더라면 이부스키 곳곳을 돌아다니다 느지막이 올라갔을 텐데, 아쉽지만 그래도 이부스키 입문은 제대로 했다. 다음엔 꼭 차를 끌고 올게(!)



PM 5:10 딥슬립 후 아뮤플라자로

온몸이 릴랙스 상태여서 인지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딥슬립을 해버렸다(...) 돌아오는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헬씨랜드가 이런 곳입니다 허허. 다섯 시쯤 가고시마 추오 역에 도착해 아뮤 플라자에서 저녁으로 초밥을 먹었다. 맛은 쏘오쏘오. 백화점 퀄리티라 큰 기대는 없었으니 다행. 오늘이 마지막 아뮤 플라자라는 생각에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고 괜히 푸드코트를 이리저리 배회했다. 순간 우리나라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내일이면 집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자꾸만 생각나서 아침에 먹을 벤또 하나를 사들고 후다닥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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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6:40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돈키호테에서의 막간 쇼핑

그대로 숙소에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일본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역시 돈키호테! 벌써 세 번째 돈키호테다 보니 뷰티 제품보다는 아이디어 상품이나 전자기기에 눈이 더 갔다. 숙소에서 쓴 드라이기가 넘모 좋았어서 찾고 싶었는데 실패. 그러다 우연히 시바 필통을 발견했다. 이거슨 운명의 데스티니. 시바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친 순간 시바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고 그대로 장바구니로 골인했다. 거기에 마지막 밤을 장식할 맛있는 맥주와 고구마 소주 미니어처까지 더해 묵직한 두 손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얼추 짐 정리를 마친 뒤 캔맥주 한 모금, 크으. 이렇게 세 번째 밤이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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