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지혜, 통찰력에 대해

설명하는 자와 방향을 말하는 자

by 데브 마인드

개발을 모르는 내 와이프가 나보다 장애 포인트를 더 잘 짚어낼 때가 있다.

한두 번이면 운이라고 넘길 수 있겠지만, 수십 차례 반복되면

이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다.

개발 지식은 전혀 없는데도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있다는 뜻이다.


이 경험은 내 뻣뻣했던 전문가적 자부심을 완전히 꺾어 놓았다.


한창 해외 서비스 오픈을 위해 출장을 다니던 때였다.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트래픽이 몰리는 중국 같은 곳에선

상상도 못 한 병목(Bottleneck)이 터진다.

DB가 뻗고, 네트워크가 꼬이고,

로직이 너무 빨라도, 혹은 너무 늦어도 버그가 된다.

수만 줄의 코드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무심하고 단순했다.


“거기 말고, 저쪽 문이 좁아서 그런 거 아니야?”


찾아보면 정말 거기가 문제였다.

나는 기술적 디테일에 매몰돼 있었고,

문외한인 와이프는 데이터가 막히는 길목을 보고 있었다.


이 경험은 내 사고를 바꿨다.

아무리 전문적이고 복잡한 문제라도,

현상의 본질적 패턴을 붙잡으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주선을 만드는 과학자의 고민도, 정말 해결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 털어놓는다면

전혀 의외의 지점에서 정답에 가까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원리를 ‘보자기 이론’으로 설명한다.

보자기를 바닥에 펴 두고 한 점을 끝까지 들어 올린다고 상상해 보자.

그 점이 높이 올라갈수록 주위의 천들도 팽팽해지며 함께 따라 올라온다.


이때 바로 옆의 새로운 점, 즉 다른 분야를 들어 올린다면 어떨까.

처음 점을 올릴 때는 바닥부터 힘겹게 밀어 올렸지만,

두 번째 점은 이미 첫 번째 점 덕분에 높아진 천의 끝자락에서 시작한다.

제로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이미 높은 시야에서 내려다보며 시작하는 것이다.


음악가가 철학 박사를 따고, 물리학자가 경제를 논하는 이유는 그들이 천재라서만은 아니다.

한 분야에서 정점, 즉 본질을 한 번 찍어본 사람은

사물을 단순화해 핵심을 쥐는 법을 안다.

낯선 분야의 복잡한 껍데기에 속지 않고,

알맹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감각이 전이되는 것이다.


전문가는 자칫 자기 분야의 지식에 갇혀 눈이 멀기 쉽다.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부족하면 현상을 나열할 뿐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반면 통찰을 가진 사람은 복잡한 상황을 단 한 줄의 원리로 요약해 버린다.


어떤 일에 금방 흥미를 잃고 이것저것 건드리기만 하는가.

그건 보자기를 여기저기 조금씩만 들춰본 것이다.

바닥 근처에 머물면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같은 수고를 반복하게 된다.


전체를 조금씩 올리려 애쓰지 말자.

일단 한 군데를 지독하게 파고들어 끝까지 들어 올려라.

그 정점의 높이가 곧 시야가 되고,

그때 비로소 다른 세상도 발밑에 들어온다.


지식에 머무는 사람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고,

통찰에 닿은 사람은

가야 할 방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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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발자의사고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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