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이라도 기다리며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허수경

by 뎁씨


시집을 읽을 때는 머리를 조금 헝클어 뜨린다. 그것이 시를 읽는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정하지 못한 마음이 홀로 시를 읽다 외롭지 않게, 나도 조금은 단정하지 못한 모습이 되어 옆자리에 앉는 것. 그것을 '사랑'한다고 쓴다.


시는 태생이 외롭기 때문에 다가서는 마음들은 그것과 같이 자꾸 침몰한다. 그러니 헝클어진 마음이 시의 풀장에서 저 아래까지 속시원하게 헤엄치고도 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한 손은 밝은 창틀을 꼭 잡고, 한 손은 마음을 꼭 따듯하게 잡아주어야지.


허수경 시인, 경남 진주, 1964 - 2018. 작년 가을 내가 이 시집을 집었을 때는 이미 이것은 유작이었다.


시집을 살 때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저 보는 것은 제목과, 휘리릭 펼쳤을 때 나에게 꽂히는 단어나 문장이 있는가. 한 문장, 한 단어만 구해낼 수 있어도 나는 시집을 데려오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것이 반백 넘은 시인의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인은 나이에 비해 어투가 빨리 단단해지고 고집스러워진다고 생각했으니까. 시인은 나는 알고 있소, 그러니 나는 그러려니 하오라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시집은 굉장히 젊고 세련된 여자가 써 내려간 따듯하고 외로운 글이었고, 그만큼 표현은 아름답고 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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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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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 밤 속에서 사랑한다 당신 보고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허수경 - 레몬 中




'다' 혹은 '나' 혹은 '까'. 점을 찍어야 할 마지막 문자에서 많은 시인들은 운율과 시적 허용이라는 이유로 점을 대신하여 개행이라는 새로운 문장으로 도망친다. 점을 찍지 않고 문장을 개행함으로써 시가 되고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점과 기호 그 외의 것들을 가득 남용하더라도,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엉망이라도 어떻게든 더 마음에 가까운 말을 더 그려내려는 간절함이 더 감동을 주는 일이 많았다.


이 시집은 시인의 시간을 담고 있다. 지나간 시간, 기다리던 시간, 기다리는 시간, 다가오는 시간, 이제 소멸하는 시간. 한 사람의 마음에 시계가 있고, 그것을 뜨겁게 녹여서 얇은 종이처럼 펴내어 엮으면 이런 시집이 나올 것 같다. 책은 강철처럼 단단하겠지만, 한 장 한장은 얇은 철판처럼 철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이제 그녀는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에요.라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멀리 아름다울지 슬플지 모를 그녀의 다음으로 떠났다. 그러니 어떤 말이라도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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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잠시 머무르겠지만, 그것을 지켜내는 믿음을 운명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어지는 운명을 바라보며 길게 충분히 운다.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다.


믿어지지 않는 것들은, 좀 더 오래 앉아 있으면 기다리면 믿어질 것 같다. 모든 불이 켜진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영화관에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영화관의 검은 천장을 너머 하늘로 사라지는 중인 이름들을 바라보며. 비슷한 이름, 단어, 한 글자라도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은 그곳에 있는지 간절히 묻는 마음으로.


그러니 기다리는 역에서 떠날 역으로 안내방송을 또박 또박 밝은 마음으로 소리내어 읽어간다. 다음에도 다시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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