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 이제니
책을 추천할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저 일부를 열어두는 방법밖에는. 너무 다름을 너무나 인정하고 살기 때문에. 나는 그저 단단해져 가는 사람을 보고 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부터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까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흑곰을 위한 문장 中
이제니라는 시인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이다. 알지만 그냥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이 있고, 잊고 싶어서 힘겹게 잊는 것이 있고,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것들이 있다면 온종일 상상하며 슬퍼한다. 나에 대해 쓰지 않는 너는 나를 너무나 알고. 너에 대해 쓰는 나는 너를 너무 모르고. 그래 우리는 수많은 가정과 예측과 계산으로 남아있자.
이제니,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 '페루'로 등단할 때부터 그녀의 언어감각은 탁월했다. 이후 그녀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그녀의 상상력과 자유롭고 싱그러운 표현들이 가득했다. 이어지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로는 점점 성숙하지만 내가 모르는 마음을 짚어내는 힘이 느껴진다. 그녀가 보는 것은 관계와 관계 사이에 피어나는 마음들. 기억나지도, 생각나지도 않는 일들을 마음에서 꺼내가는 마술. 그제야 알게 되는 것들, 보게 되는 것들. 한번 새롭게 마주한 마음들을 이제는 모른척 할 수 없다.
그녀가 바라보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조금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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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 남겨진 것 이후에 中
한 줄 와서 읽고 한 줄 와서 지운다. 한 줄 와서 지우고 한 줄 와서 쓴다. 누군가 네게로 와서 살았고 너 역시도 누군가에게로 가서 살았다. 나는 누군가의 몸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영혼이었던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밤 아무도 모르게 내리던 흰 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발화 연습 문장 _ 어떤 고요함 속에서 곡예하는 사람을 위한 곡을 만드는 사람을 떠올리는 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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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을수록 마음은 흘러간다. 누구도 없는 밤에서 시간으로서 흐르는 것과, 머무는 것과, 머무는 자리로서 녹아내리는 것과, 기다리는 것과, 떠올리는 것과, 그것이 너로서 굳어지는 것들에게로.
이제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곳으로 가십시오. 흐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타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사라지는 이유는 영원히 영원히 움트고 피어나고 만개하여 너는 나로서 부재하게 되었습니다. 무에서 유로 흐를 수 없는 것들은 유에서 무로도 흐를 수 없으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너에게로 존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시간이 흐르는 것입니까, 당신이 흐르는 것입니까.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것이던 먼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이 시간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흘러갑니다. 시간이 굳어지면 이제 밤은 없습니다. 해가 비치지 않는 것을 밤이라고 부르면 아침은 없습니다. 달이 비치지 않는 것이 아침이라고 부르면 밤은 없습니다. 밤이 있다면, 쓸쓸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다가가는 것이 밤이라면, 쓸쓸함을 싫어하는 나의 아침은 어디로 부르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밤은 원래 쓸쓸하지 않았으므로 하늘로 우주로 무한히 걸어갑니다. 밤을 검게 밝혀봅시다. 깊을수록 더 뚜렷하게 비춰봅시다. 그것이 가장 검음을 찾아 아름답게 걸어가도록.
여기에 있었던 것들과
여기에 없었던 것들과
이제 여기에 없는 것들로서.
거기에 없었던 것들과
거기에 있었던 것들과
거기에 이제 없는 것들로서 이곳과 그곳은 존재한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우리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였던, 우리였을지도 모르는 그것들은 '그 중간 그 어느 즈음' 이 가장 알맞은 주소에서 흩어지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멀리서 언제쯤 옆에 앉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했던 말들을 적어두는 일이 많다. 대개 그 옆자리에 앉기 위해 필요한 것들. 나는 당연히 모르는 것들. 너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 그것들을 간격이라고 이해한다. 부른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므로 흘려 쓴다.
시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말과 책의 마지막 뒷페이지에 쓰인 것들로 글을 흘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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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이제 나는
손을 하나 그리고
손을 하나 지우고
이제 나는
눈을 하나 그리고
눈을 하나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지웠다고 하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미웠다고 하나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이제 나는 깊은 밤 혼자 무연히 울 수 있게 되었는데
나를 울게 하는 것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다.
오로지 달빛
다시 태어나는 빛
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2019년 1월
이제니
부서지며 사라지는 윤슬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처럼, 눈멀어가는 마음으로 무한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자각하게 될 때. 그렇게 순간의 빛으로 현현하는 죽음의 한순간 속에서. 누군가의 울음인 듯 내 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어. 무한의 표면을 만질 수 있다면 그 목소리와 목소리의 질감으로 가만가만히 펼쳐지겠지. - 시집의 마지막 장.
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