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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안 Jun 19. 2021

예술의 역전

심보선 작가의 ‘나는 시인이 아니랍니다!’를 읽고

 

총원 3명인 우리 집안에서 가장 예술적 감각이 없는 사람은 나다. 한때 예술인의 삶을 꿈꿨던 아빠, 지금도 종종 글을 쓰고 -솔직히 엄마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나누는 엄마는 가문을 기준으로도, 전국을 기준으로도 예술을 자주 향유하고, 그 감각을 ‘잘 아는’ 이들이다. 나? 학습된 예술만 있을 뿐이다. 학원에서 배운 기타와 피아노, 학원에서 잠시 배운 미술, 이우 생존형 글쓰기… 내게 예술은 시대를 보다 편하게 살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학습이자, 기본 교양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에게도 그렇고, 다른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친구들에게 경외심을 가진다. 내가 소유하지 못한,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을 천연히 펼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나는 감히 누리지 못하는 감각을 누리는 데에서 비롯된 경계다. 이러한 경계는 생각의 끈을 놓치는 순간 자칫 냉소적 방향으로 흐르곤 한다. 왜냐, 나는 자의식이 강하니까. 이를테면 ‘저거 다 쓸모없는 재능이야’라는 방식의 냉소다.


이 시대에 ‘쓸모없는’ 재능은 무슨 의미인가? 현실에서 사용될만한 가치, 효능이 없는 재능이란 것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노동 시장에서 안정적 지위에 오르지 못해 노동자로 사용될 수 없는 재능이라는 거다. ‘쓸모없다’는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용될만한 자원으로 생산력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냉소다. 실은 비단 예술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데, 우리는 종종 인문사회계열 전공이 노동 시장에서 안정된 지위를 가지지 못할 것을 우려하며 비슷한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심보선씨는 사회학자로서의 삶을 예술인(시인)의 삶과 분리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예비 사회학 전공 학부생들에게는 사회학 전공자의 삶 또한 예술인의 삶과 달라보이지 않는다.  


전자 매체와 기술 복제의 시대, 예술인(시인)들이 느끼는 “쓸모없는 것이 사라진다”는 위협은 더욱 광범위한 개념이다. 전자 매체와 기술 복제는 대자본의 현 시대를 설명하는 상징적 현상이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었던 예술이 가치를 잃으며, 차츰 인류의 경험과 정체성은 자본에 의해 잠식될 것이다. ‘인간 목숨보다 중한 돈’이라는 표현은 도통 줄지 않는 산재 현장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


앞서 예술, 그리고 인류가 누리는 고유의 감각을 냉소했지만, 역설적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 또한 예술과 인간성이라 생각한다. 이 시대 주류의 논리에서 가장 동떨어진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보루...라고나 할까. 김규항씨는 지난해 한 포럼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 시스템은 개인을 자본의 흐름을 돌리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한다. ‘쓸모없는 일’, 생산적이지 못한 일은 그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지닌다.”고 말했다. 예술의 역설적 가치는 우리 사회 기성의 도구주의 논리에서 벗어나, 대안을 상상하는 이들에게서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모두가 예술적 감각을 다채롭게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두가 혁명을 꿈꾸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제는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피로를 느낄 때, 독립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보고 싶을 때, 예술이 곁에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술은 다른 삶이 존재하고, 가능하다는 도움의 메시지이며, ‘시장에서의 실패’가 아닌 시대저항적 역전임을 일깨워주는 상상력이다. 물론 심보선님에게는 ‘시 금고’를 열어도 괜찮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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