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는...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가슴 부풀어하며, 그곳에서 기도를 드려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곳으로 다시 가기 전까지 매일처럼 그 성당을 생각하는 것이 일상의 습관처럼 되어버렸을 정도로, 성당은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재회라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것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재회, 재발견, 그리고 회상은 모든 기쁨과 향락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 보는 것, 처음 듣는 것, 처음 맛보는 것 등은 아름답고 위대하고 쾌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에게 늘 생소할 뿐이어서 놀라움만 남길뿐이다. 때문에 그런 것을 즐기려는 노력이 향락 그 자체보다 더 크게 되기 마련이어서, 안정이란 것은 찾을 수가 없을 뿐, 익숙한 곳에 돌아오게 되어서야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추억이라는 바다 속에서 헤엄치게 된다. 그러면 넘실거리는 파도는, 그 꿈꾸는 사람을 추억의 언덕으로 실어다 준다.
차창 밖으로는 라인 강의 줄기를 따라 녹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가끔 산 언저리에는 오래된 옛 성이 보였고, 유유히 흘러가는 라인 강 위로 유람선 한 척만이 나의 뒤셀도르프[Duesseldorf] 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기차는 쾰른[Köln] 역에 정차했다. 내 볼에 닿는 햇살은 아침의 이슬을 머금어 촉촉했으며, 내 눈에 비칠 만큼 공기는 상쾌했던 것 같다. 그런 쾰른의 하늘을 뒤로하고 내 눈을 뗄 수 없던 성당 하나가 스쳐 지나갔는데, 어린아이 마냥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성당이 작아질 때까지, 그렇게 난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다.
그 후로 난 그 일을 너무나 행복스럽게 생각했고,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그때로 다시 돌아가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가슴 부풀어하며, 그곳에서 기도를 드려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곳으로 다시 가기 전까지 매일처럼, 그 성당을 생각하는 것이 일상의 습관처럼 되어버렸을 정도로, 그 성당은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는... 그 성당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기에 이르렀는지는 나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여러 해 뒤에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에는, 난 어떤 나만의 특권을 가진 듯했었다. 그 당시 내가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마음이란 말로써 다 옮길 수 없을 때가 있으며, 또 "말없는 생각" 이란 것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누구나 한없는 기쁨과 고통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겠는가... 그 날 내가 느낀 것은 기쁨도 고통도 아니었다. 뭐라고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느꼈을 뿐, 나의 내부에서는 갖가지 상념들이 어지럽게 날고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것들은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려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모두 소멸해버리는 별똥별 같았다. 간혹 사람들은 꿈을 꾸면서 "지금 꿈을 꾸는 거야"라고 자신에게 타이를 때가 있는데, 나도 스스로에게 그와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다.
- 난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쾰른 대성당[Kölner Dom]처럼 나의 기억에 뚜렷이 자리 남은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미술사학적이나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독일 건축의 최초, 최고의 고딕 양식 때문도 아니며, 역사학적인 측면에서의 평범하지 않은 건축기간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쾰른 대성당에게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쾰른 대성당은 내게 처음으로 기독교의 참된 교리를 소박한 형태로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성당이 어떤 이론적인 이야기나 다른 이유가 있건 간에, 그 가르침을 믿고 안 믿고는 오로지 나의 자유의사인 것이다. 그 가르침은 내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쾰른 대성당을 처음 대하고서 나는 진리의 힘을 강렬하게 느꼈고, 거기에 압도당하고 말았었다. 오랫동안 나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진리가 마침내 "나의 것"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빛살처럼 나의 내부를 뚫고 들어와 내 마음의 눈을 밝혀주고, 어렴풋이 예감했던 것을 아주 명료하게 해주었으니...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거무스레한 빛을 발하고 있는 성당의 외부는, 중세 및 근대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속성과 강렬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콘란드 대 주교가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과시했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지만.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장관을 이루는 대성당의 정면에서는 대단히 위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로서는 지구상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돌과 유리로만 된 건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고딕 건축의 특징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역사적인 독특한 점을 찾아보려는 시도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어 몇 시간이고 쳐다봐도 싫증이 나지 않은, 새벽의 여명을 찾고자 했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거대한 상탑 꼭대기에는 금빛 십자가는 없다. 그 대신 그 꼭대기에는 그로데스크 한 돌조각들이 있고, 정문 바로 위쪽에 솟아 있는 탑 꼭대기의 금빛 별만이 하느님의 그 무한한 시선을 보는 이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주기라도 하는 듯 빛나고 있다. 고딕의 수직성을 너무나 강조하여, 같은 시대의 프랑스 고딕 성당보다는 단조로움을 주고 있지만, 이 단순함이 외관의 정돈미를 주는 원인이 되는 듯싶다. 인간의 눈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가끔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시켜 보듯, 대성당은 어린 시절 하늘에 그린 환상이 낳은 완전한 모습을 만들어내게 한 것이다. 이 기적과도 같은 건물은 멀리 떨어져서 보더라도 하늘의 영광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쪽으로 돌아가면 네오고딕 형식의 모자이크 장식을 한 구리제 정문이 현대적인 색채를 자아내며 그 위엄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출입구 회랑은 아주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과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에 보이는 돌 더미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건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눈 앞에 떠오르는 듯이 보인다. 천상의 주인처럼 정문 주위에 배치된 조각들도 너무나 경쾌하게 그 어떤 무게를 지니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성상[成相]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이 보이고, 금방 움직일 것처럼, 서로를 엄숙하게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옷은 텅 빈 껍데기도 아니고, 순전히 장식적인 두루마리도 아닌, 그 아래 살아 있는 육체가 있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듯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져 있다. 형상이 실감 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로마의 비석이나 개선문 같은 이교도의 석조 유적들을 보고, 이에 눈을 뜨거나 그러한 방법을 자연으로부터 배워 성서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더욱 실감 나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각각의 조상[彫像]들은 명확하게 특징지어져 있어, 구약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조상[彫像]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을 것이며, 그렇듯 너무나 쉽고 완벽하게 교회의 가르침을 구현하고 있다. 각각의 조상[彫像]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인물이며, 다른 것과는 그 태도나 미의 형태에 있어 판이하고 각기 개성적인 위엄을 풍기고 있다. 아마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든지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주 된 장면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으리라...
이렇듯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조각 하나하나는 신도들의 그 뜻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상징으로 분명히 나타내어져 있다. 이 조상[彫像]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성한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진실을 엄숙하게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건물에 들어섰을 때 받은 인상이란 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마도 이 세상 말고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엿보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내부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설교와 찬송을 통해 진주로 만들어진 문과 값진 보석, 순금, 투명한 유리로 된 시가(市街)로 이루어진, 천국의 예루살렘([요한계시록] 21장)에 대한 환상의 광경이 천국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믿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성당 안에서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많이 대할 수 있어 경건한 감흥에 잠겼다.
성당 내부의 벽은 차갑거나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것이 아닌, 보석처럼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되어 있고, 기둥과 창틀의 격자무늬들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별다른 치장 없이 동일한 요소들을 반복시켜 매우 단순하지만, 밝고 경쾌한 느낌과 함께 질서 정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무겁고 단조롭고 지상적인 느낌을 주는 모든 것이 제거된 듯하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데 몰두해 버린 신도들은,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신비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으리라......
스테인드 글라스는 12 사도의 모습과 동방박사의 경배,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 애도, 성령강림 제 날 성령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고, 성 피터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분명히 스테인드 글라스의 인물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이 미술가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듯 보였으며, 무엇을 표상하느냐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상하느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내부 전체는 가느다란 기둥과 늑재[肋材 / frame]로 교직 되어 있으며, 빈 벽이나 육중한 기둥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아찔하도록 높은 천장을 지탱해 주는,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하게 얽힌 각 부분의 상호작용을 그 누가 이해하지 못할까? 이 망(網)이 천장을 덮고 있고, 이들은 주랑의 벽을 타고 내려와 기둥에 한데 모여 하나가 된다. 창문조차도 "트레이서리[tracery : 교회 창문 윗부분의 돌에 새긴 장식 무늬]"라고 알려진, 서로 얽힌 격자무늬로 덮여 있다. 수직적 상승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열주의 간격을 좁게 설치해 수직선을 강조하고 있고, 기둥 위에 덧붙인 작은 기둥들을 이음매 없이 곧바로 궁륭까지 치솟게 하여, 수직적 상승효과를 배가 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그 규모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어서, 인간적이고 사소한 모든 것들은 단지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다. 그 손길에서 나는 지울 수 없는 전율을 맛보았고, 어린 시절의 꿈들이 내 영혼 속에서 펄럭거림을 느꼈다. 나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나는 깊고도 신비로운 빛을 응시하면서 성당에서 느껴지는 영혼의 평화가 내 영혼에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나는 몸을 일으켜 말없이 성당을 나왔다.
이렇게 추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그 추억의 파문이 나의 머리를 짓누르고, 가슴속에서는 긴 탄식이 흘러나오게 하여 지금까지 깊은 사념에 사로잡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면 꿈의 세계는 첫 닭이 울면 사라지고 마는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