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프랑스 파리의 낭만을 꿈꿀 때 그렇게 난 뮌헨으로 향했다.
그렇게 새로운 현실은 내게 다가왔고, 내가 맛보았던 기쁨은 하나의 꿈이 되었다. 인간의 생애에서 그런 순간은 별로 많지 않으며, 그런 환희를 맛보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꿈이 현실로 다가서는 기분을...
애초에 처음이라는 것이 없는 편이 나았을 것을... 왜냐하면 그 처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려면, 온갖 사고와 추억들이 사라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절로 돌아가 그때부터 시작하여 다시 또 무한한 과거로 꿈을 꾸며 들어가면, 심술궂은 그 처음이란 것은 점점 도망쳐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나의 생각은 아무리 그것을 잡으려 해도, 결코 그것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처음이란 것은, 가을바람에 낙엽 하나가 내 발치에 떨어지듯, 그렇게 불현듯 기억 속에서 솟아날 때가 있다. 보들보들한 파란 하늘을 볼 때라던가, 황금빛을 발하는 노랑과 주황의 가을 잎들을 볼 때면, 10월 뮌헨의 가을 하늘과 들녘이 언제나 아련해진다. 그 당시 내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났는지 그걸 죄다 기억해 낼 수는 없다. 마치 혈관 하나가 끊어졌거나 신경이 잘려나간 듯한 기분이었던 것 밖에... 그리고 잠시 후 온갖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것... 그뿐 이다.
10월 어느 날, 이른 아침의 공기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듯 "쉬~"하며 나의 발그스레한 볼을 살짝 스쳐 지나갔고, 그렇게 세상은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내 앞에 놓인 하늘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날 내가 느낀 것은 기쁨도 고통도 아니다.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느꼈을 뿐이다. 뮌헨[München] 공항에서 마리엔플라츠[Marienplatz]역으로 가기 위해 홀로 탄 전차[U-Bahn]의 고요한 미동에, 냉정을 되찾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내게 이렇게 말해 보았다.
"내가 찾고 생각하고 바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다."라고...
차창 밖으로 펼쳐진 황금빛 가을 들녘이 나의 자유의 시작이었고, 아침을 부르는 붉은 태양의 강렬한 태동은 나의 희망이었다. 그 날은 숨을 멈추고 내 두 눈이 흐릿해져 몽환의 세계로 이끄는 것 같은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시간이 멈춰버려 그곳만을 영원히 바라보고 싶을 만큼... 후에 있을 또 다른 새로움을 예감하지 못한 채, 오래된 풍경처럼 그곳에 내가 멈춰 있었다. 모두가 프랑스 파리의 낭만을 꿈꿀 때 그렇게 난 독일로, 뮌헨으로 향했던 것이다. 새로움을 하나하나 맛보는 그 순간부터 서서히 낯선 곳에 있는 이방인이라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U-Bahn에 홀로 올라탄 겁 없는 작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은 그렇게 기쁨과 불안이 뒤섞여 두근거렸다.
기나긴 여정이 끝나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온갖 것들의 새로움에 넋을 잃고 말았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한시도 나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무(無) 속으로 소멸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바라겠지만, 짧은 순간 느꼈던 꿈결 같은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달콤한 숨결에 쌓였던 무렵... 그렇게 나의 정신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듯 피로가 가신 눈을 움직여,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기 위해 주의 깊게 주위를 살피었다. 그리고는 오히려 두려움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주위는 앞으로 가도 옆을 보아도 또 어디를 봐도 도대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그러나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들로, 꿈속에서 금방 깨어난 정신은 아찔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리엔플라츠의 드높은 가을 하늘을 뒤로한 채 서 있는 붉은 지붕들과, 앞이 확 트이고 볕이 잘 드는 곳에 우뚝 선 신시청사, - 높은 탑 및에 이르기 훨씬 앞서부터 나의 눈은 탑 꼭대기에 못 박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노천카페들 앞에 줄지어 선 고색창연한 의자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예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언제나 사진에서 보아왔고, 상상 속에서 그려왔던 유럽 어느 골목길의 노천카페는 나의 현실 앞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지친 몸과 정신에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는 그날이 주일 아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새로움의 충격으로 정신은 혼미해져, 벌집에서 벌이 윙윙대는 것과 흡사한 소리가 귓전에 울리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내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그러나 그것은 나의 쓸데없는 걱정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같은 넋이 나간 사람들을 그들은 매일같이 봤을 것이며,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지나지 않을 테니... 하지만 난 나의 그런 모습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네들의 일상에서 보이는 삶에 다시 넋을 잃었다. 뜨내기의 눈엔 그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표정엔 가늠할 수 없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 그 날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풍경에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아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날 하루를 포근히 감싸 줄 숙소를 찾으러 다시 S-Bahn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찾아가는 과정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마리엔 플라츠역에서 파징[Pasing]역까지, 그리고 파징역에서 호텔까지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었으니까.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호텔이었지만 20여분을 헤매고 나서야 작은 간판에 프로스트[Prost]라고 적힌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호텔에 무거운 짐을 떨구어 버리고 나의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동반자인 카메라만을 들고 다시 마리엔플라츠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때부터 행복에 겨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생의 처음으로 페스티벌이란 것을 즐겼으며,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신나는 것이라는 것도... 신 시청사가 멋들어지게 비친 창 아래에서 시원한 독일 맥주에 흠뻑 취해도 보고. 개인적 자유에 한창 고무된 그런 기회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내가 맛본 그 자유 속에 머물러 있기라도 한 듯 연신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자유롭게 했을까? 무엇이 그들의 삶에 여유를 안겨 주었을까? 말끔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푸른 하늘이 반사되어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맥주잔에 연신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 무엇을 그리 보고 있어?
- 맥주 속에 있는 하늘.
웨이터는 잠시 다른 곳으로 가더니 이내 다시 내 옆으로 와서 환하게 웃었다.
- 맛은 보았어?
- 응
- 어때?
- 태어나서 이렇게 맛 좋은 맥주는 처음이야.
- 그럼 맛 좋은 맥주를 처음 맛본 소감이 어때?
- 음... 글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음... 삶의 맛이라고나 할까? 황금빛 가을 들녘을 마시는 기분이야.
그의 얼굴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소감을 대신 전했다.
- Wunderba!!
그렇게 새로운 현실은 내게 다가왔고, 내가 맛보았던 기쁨은 하나의 꿈이 되었다. 인간의 생애에서 그런 순간은 별로 많지 않으며, 그런 환희를 맛보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꿈이 현실로 다가서는 기분을...
점심 나절 때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 늦게야 멈추기 시작했다. 줄곧 비를 맞은 이유에서인지 약하다거나 고단하다는 감정들로 인해 익숙한 곳을 찾게 만들어 버렸으니... 회색 빛 하늘이 그렇게 포근하게 느껴지기란... 여유란 이런 것인가? 하늘에 낀 구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따뜻한 눈물 같은 비가 잠시 내리고 나면 그것은 어디론가 곧 가버리고 없었다. 그리고 조용한 저녁놀의 홍조가 하늘을 온통 물들였고 태양은 다시 한번 그 신비로운 광채의 빛을 발했다.
지붕에서는 차가운 밤공기를 식혀줄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리에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늦은 시간 음식점에서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분망 한 것 같았고, 나는 그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음속에서 그려보았다. 실제로 어떤 것인지 만약 세밀하게 이야기하라 하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울고 웃는 사람들의 모습과, 오랜 친구를 해후한 무리들이나, 낯선 곳이 마냥 신기해 결코 호기심을 떨쳐내지 못하는 나와 같은 이방인들... 그 노랫소리엔 이런 모습들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가지가지 법칙이 부과되어 있는 듯했다. 바람 없는 날에 내리는 알프스의 눈처럼, 안개가 냇물 위에 자욱이 서리어 있는 물 위와 냇가의 부드러운 진흙처럼, 늙은 재봉사가 바늘귀에 실을 꿸 때의 모습처럼 말이다.
조용하고 밝은 저녁이었다. 밤이슬이 햇빛과 싸우고 있는 언저리는 저녁놀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태양이 침묵하는 쪽은 낙조로 물들었다. 피에 톤이 고삐를 버렸을 때, 그 때문에 하늘은 지금 보는 바대로 불탄 것이다. 밤보다는 밝고 낮보다는 어두운 시야 속에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방인들을 위해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 어디서든 성모교회의 종탑이 보였다. 그 종탑은 저 멀리 개선문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비둘기가 돌아가고 싶어 지면 힘껏 날개를 움직여 넓은 하늘을 제 마음대로 가로질러 휴식의 둥지로 돌아가듯, 그렇게 종탑을 향해 안식의 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꿈결 같은 하루는 저물었다.
하늘은 별의 반짝임을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여름날에 내리는 한줄기 서늘한 빗줄기와 같았다. 그 하루라는 시간 동안 기뻐할 수 있는 만큼의 기쁨을 맛보았다. 내가 갖는 유일한 행복의 시간들이었으며, 결코 목표에 다다를 수 없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결코 끝남이 없는 향수를 남겨주었다. 오직 나만이 홀로 나그넷길의 고달픔과 애련의 고뇌와 싸울 채비를 갖추었던 것처럼, 그 여행의 광경을 기억은 그렇게 그릇됨이 없이 전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