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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공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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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vil May 01. 2020

Craft 01. 손바느질

오래되고 낡고 휘어진 바늘.


바늘에 찔린 부위에 아주 자그마하게 핏방울이 맺힌 나의 손은, 내가 잘 알고 있는, 하지만 기억 저편에 숨어 버린 어떤 광경과 느낌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바늘을 쥘 수 없었던 손, 무언가 무던히도 해 보려 했던 작은 손, 나의 시간을 함께 지나온 거친 손, 그 손이 이제는 조금 단단해졌고, 아픈 것을 참아가며, 바느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휘어지고 벗겨져 볼썽사나운 모양새로 변하긴 했지만 지금껏 잘 견뎌내고 있는 바늘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손끝이 아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은 상처지만, 바늘에 찔린 상처는 그 어떤 상처보다 더 아프고 신경에 거슬린다. 그리고 고통도 오래간다. 바늘을 잠시 내려놓고 상처 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엄지 손가락으로 찔린 곳을 꾹꾹 눌러보았다. 상처 난 곳을 그렇게 눌러대면 아프다는 느낌이 먼저 들겠지만, 그때 문득 든 생각은 몇 개월 전 친구가 내 손끝을 만지면서 했던 말이었다.


“예전에는 손가락 끝이 말랑거리면서 부드러웠는데, 이제는 손끝이 많이 단단해졌어.”


친구 말대로 손가락이 많이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정말로 단단해졌는지 아니면 친구의 말이 생각남과 동시에 나의 뇌가 단단해졌다고 인지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엄지손가락에 닿은 손끝은 단단하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반질반질하고 말캉거리던 살성이 잘 익은 천혜향 껍질처럼 조금 질겨진 듯했다. 




“바느질 재미있어? 바느질이 뭐가 좋아?”


나는 나 대신 하얗고 반들반들한 공단에 곱게 물든 공단 실이 꿰어진 바늘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수를 놓고 있는 언니 옆에 앉아 있었다. 


“하던 숙제 마저 끝내.” 


계속해서 같은 질문만 하는 동생이 귀찮을 법도 한데, 언니는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했다.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이어 어떤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리라는 것을 알아 차린 모양이었다. 언니는 동생의 연산되는 질문을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그리고 상대방의 기분이 전혀 상하지 않게 멈추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언니의 대답도 무시한 채, 즐겁게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는 언니의 모습에서 무엇이 재미있는지 찾아보려고 턱을 괘고 앉아 바늘을 쥐고 있는 언니의 손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니의 시선과 새하얀 공단 사이에는 호기심 가득한 나의 눈초리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 어떤 빈자리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언니의 미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대양처럼 심오했다.


 

 청소년기에 나는 면역력 결핍이라는 병을 앓았었다.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면역력이 저하되어 손가락 끝에서부터 손목까지 피부가 벗겨졌고, 그 증상은 연약한 피부 부위에까지 급속도로 번져, 그 가느다란 바늘 조차도 손에 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내린 처방은 면역력이 부족하니 약물 치료도 할 수 없어, 식이요법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집과는 달리, 내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며 주방 한켠에는 과일 박스들이 늘 풍족하게 쌓여 있었고, 상위에 올라오는 반찬들은 언제나 제철 음식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식재료로 항상 맛있게 요리를 해 주신 엄마의 고생 끝에 나의 병은 1년 만에 완치가 되었고, 오빠와 언니는 그로 인해 또래 친구들보다 좀 더 튼실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러니까 난 말이지, 과일을 약 먹듯 먹었던 난, 이제는 귤이나 오렌지 같은 신 과일은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났고, 사과와 배는 명절 때 보는 것조차도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과일을 먹을라치면, 한 조각 이상은 먹지 않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그 크기가 어떻든, 한 조각만. 이런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을 제외하고는, 면역력 결핍이라는 병으로 인해 그 당시는 내게 굉장히 운이 좋았던 시기라 생각된다. 


 병이 걸린 것 자체가 운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마음에 운이 좋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아파도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늘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손이 아파 무엇 하나 손에 쥘 수 없기에 과제라는 것은 늘 언니와 오빠가 옆에서 도와주었기에 운이 좋은 거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그렇게 싫어하는 가사 시간의 실기 과제인 바느질을 언니가 대신해 준다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았었다. 손바닥은 따끔거리면서 시렸고, 또 쓰라리기도 했으며, 피 맺진 자리에는 피딱지가 엉겨 붙어 보기는 흉했지만, 그 손으로 턱을 괘고 앉아서 싫은 기색 없이 나 대신 바느질하고 있는 언니를 보고 있는 시간이 마냥 흐뭇했고 행복했으며, 그 행복함은 보이지 않는 베일처럼 부드럽게 언니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차분히 앉아 수를 놓고 있는 언니 옆에서, 때로는 소리 내어 책을 읽다가, 때론 바닥에 가만히 누워 바늘이 공단을 뚫고 지나가는 가느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는 그 시간에 느낀 행복감이 참으로 좋았다.


 그림을 곧잘 그리고, 손으로 무엇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가사나 가정 시간에 배우는 바느질에는 영 관심이 없었고, 관심이 없다 보니 소질도 없었을뿐더러,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려웠다. 작은 바늘 하나로 여러 색상의 실을 바꿔가면서 새하얀 공단 위에 그림을 그리듯 수를 놓는 것이 어찌나 어려웠는지. 그리고 그 어려운 것을 아픈 동생을 대신해 싫은 내색 없이 즐겁게 하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 또 얼마나 좋았었는지. 그 당시 나란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나.


 

 아마도 그 바느질이란 것이 속해 있던 과목이,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둘러싼 자연현상을 우주론적 사고방식으로 관찰한다거나, 발치에 굴러다니는 작은 모래 알갱이를 가지고 약간의 화학적 작용을 통해 또 하나의 유용한 것으로 감쪽같이 바꾸는 연금술의 비밀을 배운다거나, 혹은 인상파 화가들처럼 빛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순간의 색채를 캔버스 위로 옮겨놓는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옛 가곡이나 고전을 들으며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만 있었어도 가사라는 과목은 굉장히 매력적이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학문의 원초적인 감흥을 전혀 느껴 보지도 못하고 바느질은, 아니 가사라는 과목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가듯, 그리고 내 손에 새 피부가 차 오르듯, 다른 무수히 많은 추억들로 덮여 잊힌 기억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바늘을 잡아본 기억이 없다. 20대를 시작하면서부터 한 손에는 붓이, 그리고 양 손은 늘 유화 물감이나 아크릴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내 손은 컴퓨터의 키보드 위를 떠난 적이 없었고, 내 오른손은 늘 마우스를 거머쥐고 있었다. 바늘이란 것은, 그러니까 바늘이란 것은 나의 20~30대에서는 구시대적인 유물로, 엄마의 장롱 속 오래된 바느질 함에서나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가끔 쓸모 있는 생활용품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 손은 붓 대신, 펜 대신, 그리고 마우스 대신, 바늘을 쥐고 있다. 바느질을 그리 싫어했던 내가, 바늘의 필요성을 눈곱만큼도 알아채지 못한 내가, 몇 년 동안 써 왔는지도 모를 휘어지고 벗겨진 바늘을 쥐고 있다. 그리고 바느질하는 시간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 바느질하면서 즐거워하던 언니처럼 그런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바느질이 좋아진 것이다. 거친 바깥세상의 현실에서 물러나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자신만의 은밀한 은신처를 이제야 찾은 나처럼, 나의 언니는 아무런 속박 없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발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늘에 찔린 부위에 아주 자그마하게 핏방울이 맺힌 나의 손은 내가 잘 알고 있는, 하지만 기억 저편에 숨어 버린 어떤 광경과 느낌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바늘을 쥘 수 없었던 손, 무언가 무던히도 해 보려 했던 작은 손, 나의 시간을 함께 지나온 거친 손, 그 손이 이제는 조금 단단해졌고, 아픈 것을 참아가며, 바느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휘어지고 벗겨져 볼썽사나운 모양새로 변하긴 했지만, 지금껏 잘 견뎌주고 있는 바늘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난 5월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창 아래에서 바늘귀에 실을 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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