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
어젯밤 11시가 넘어 남편이 들어왔다. 다음날 있을 면접 준비에 끼니도 대충 때워가며 공부한 모양이다.
2주 전부터 저녁에 잠시 집에 들러 밥을 먹고 바로 나가 공부하는 일상을 반복해오고 있다.
회사, 집, 카페를 오가며 바쁜 일상을 보내는 남편은 아침마다 출근하기 버거워 보일만큼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작년 2월 퇴사 후 여섯 달 정도 공백기를 가졌던 남편은 경제적으로 쪼들려오고 심리적 압박감도 커져 잠시 프리랜서로 일하는 중이다. 진작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이직 준비할걸 그랬다고 내게 마음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이럴 땐 더할 나위 없이 속 깊고 다정한 남편이다.
남편을 안 지는 13년째다.
스물두 살,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어보려 동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하던 곳 옆 옆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 바로 남편이었다. 같은 곳에서 일한 것도 아닌데 안면을 트고 연락처도 알게 된 건 두 가게의 사장님들이 서로 자매 사이라 자주 오갔기 때문이다.(심부름을 많이 시키셨다.) 그때의 난 군대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던 중이라 지금의 남편에겐 전혀 호감을 갖지 못했고 남편도 내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본인이 군대를 간다며 밥 한번 먹자는 문자가 왔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러자고 했는데 약속 당일, 여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밥 먹는 걸 싫어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먹지 말자고 쿨하게 답장했는데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동생에게 지가 먼저 밥 먹자 했으면서 지가 취소를 했다며 험담을 했고 그 이후로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남편이 제대한 2009년, 어찌하다 메신저로 쪽지 몇 번 주고받고 두어 번 만나다 그게 인연이 돼서 6년 연애 후 결혼을 했다. 사실 결혼까지는 할 줄 몰랐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의 남편과 소심하고 속 좁은 나는 연애할 적부터 많이 다퉜기 때문이다.(일방적으로 내가 삐졌지만) 관심사나 취미도 안 맞고 오로지 맞는 건 먹는 것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완벽히 맞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건 비슷했다.
쌀국수를 못 먹던 남편이 날 만나서 쌀국수를 좋아하게 되고 샤부샤부와 월남쌈도 이런 거 왜 먹냐며 혹평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좋아한다. 물론 나도 치킨을 무척 좋아하는 남편에게 밤에 먹으면 살찐다 잔소리했지만 이제는 같이 먹고 있다. 결국엔 그닥이고 별로였던 서로의 음식들이 좋아져 버렸고 그렇게 서로에게 섞이고 스며들어 부부가 되고 아빠 엄마가 되었다.
얼마 전 아이를 재우고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거기 김치찜 집 없어졌던데? 우리 많이 갔었잖아."
"여보 동네에 있던 떡볶이 집 아직도 하나? 거기 나 고등학교 때부터 가서 먹었잖아."
"우리 칼국수 먹으면서 소주 마셨던 거 생각나? 그날 밤에 갑자기 삼겹살 먹고 싶어서 문 연 식당 찾아서 먹었었잖아."
얘기 끝에 그 당시 몰랐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직장 생활하느라 서울에 있던 날 보러 온 남편은 내가 밤에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다고 하자 선뜻 사준다고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학생이던 그의 지갑 속엔 왕복 차비와 한 끼 밥값 정도만 있었는데 저녁으로 먹은 칼국수 값을 내고 나니 딱 차비뿐이었다고. 차마 돈이 없다 말할 수가 없어서 일단 먹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따라나섰다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말을 한다.
속이 깊고 힘든 건 여간해선 말하지 않는 입이 무거운 우리 남편.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고 공백기에도 빨리 취업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가벼운 농담은 툭툭 잘 뱉어내지만 진짜 깊이 생각하는 속마음은 함부로 뱉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편의 그 결정들이 결코 한순간에 이뤄진 게 아니란 걸 13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있었던 면접의 결과가 어쨌든 오랜 친구같은 그의 앞길을 묵묵히 같이 걷는 사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