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 같은 금명이들
"양금명씨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아요. 트리.. 그거 어디 내놔도 지가 할 일 하잖아요."
"지가 할 일이 뭔데요?"
"트리는 지하 단칸방에 있어도 다 망한 가겟방 앞에 서있어도 반짝반짝하잖아요. 두근두근 하잖아요."
갑자기 웬 칭찬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는 금명에게 충섭이 멋쩍어하며 말한다.
"그냥 오늘이라 말해본 거예요. 나도 금명씨 어화둥둥 한 번 해주고 싶어서."
금명은 더 이상하다.
"어디 가세요?"
촉이 맞았다. 다음날 충섭은 군대에 갔고, 금명은 그의 작업실 트리 옆에서 커다란 그림을 발견한다. 어두운 작업실 한켠 그림 속에서, 삶이 칙칙하던 충섭의 마음속에서 금명은 트리처럼 반짝거리며 두근거림을 만들고 있었다.
많은 여인들을 충섭이 편으로 만든 <폭싹 속았수다>의 명장면이다. 덕분에 트리가 다시 보였다.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킴으로써 응원과 설렘을 주는 존재로.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트리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해마다 생화트리 클래스를 한다. 내 마음속에서 트리처럼 빛나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고 싶어서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들, 한 해 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을 한 번에 보면서 행복한 시간까지 단체선물할 수 있는 건 꽃선생님만의 어마어마한 특권이다. 생화라는 강력한 최대공약수가 아니면 이 사람들을 못 만나거나 마음을 표현 못하고 내년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연령대도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다른 이들이 하나가 되는 마법의 시간. 손끝에 같은 감촉이, 코끝에 같은 향기가 맴돌기 때문일까. "어머 나무라서 까슬할 줄 알았는데 부드러워요!" 나뭇잎을 고양이처럼 쓰다듬으며 함께 웃는다. 비단향이라는 나무는 물량이 많지 않아 내가 늘 예약해 놓고 쓰는 귀한 소재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비단처럼 보드랍고, 만지는 동안 손에 향기가 배어든다.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비단처럼, 톡 쏘지도 무겁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은 향이다. 클래스를 마치면 손을 씻지 않고 싶어 지지만, 손을 씻어도 종일 남는다.
한 명이 향이 정말 좋다고 하면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다들 향을 한번 더 맡아본다. 생화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다. 캐럴을 틀까 하다가, 사람들의 대화가 더 생기 있어서 음악처럼 듣는다.
"올해도 와서 정말 좋아요."
"작년에 거의 네 달 동안 싱싱했어요."
"어머 그렇게 오래 가요?"
"나도 오래 봐야지!"
다른 음악도 있다. 가위질하는 싹둑 딱딱 소리다. 누군가 가위소리도 힐링된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 역시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다른 고민 없이 가위질을 할 일이 일 년에 얼마나 될까.
처음 플라워클래스를 시작하던 시절 늘 와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칭 '평생회원'이었다. 그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그중 한 명인 J님은 열일곱 살 산골 소녀 같은 투명한 사랑스러움을 아직 가지고 있는 분이다. 쌍둥이 손주가 생겨서 한동안 못 오시다가 지인에게 아이들은 잠시 맡겨두고 신데렐라처럼 어려운 시간을 내셨다.
J님은 여러 번 수업 오신 경험자답게 마음 편히 만드신다. 풍성하면 무조건 만족스러워지는 걸 아시는 분이니 다 채우려 하지 않고 큼직한 트리를 완성한다. "나중엔 다 예쁘고 선생님 손길 닿으면 멋져지더라고요" 경력자의 안심멘트에 모두가 느슨히 즐기게 된다. 드디어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고, 봄에 집 마당에서 꽃클래스 하자고 하신다. 정원에서 하는 수업이라니, 내년이 기다려진다!
이번엔 혼자 왔다고 쑥스러워하셨는데 친구가 생겼다. 전원주택에 사는 H. 게다가 H의 집이 TV에 나온 걸 봤다며 낯익다고 반가워하신다. 정원을 가꾸는 노하우, 재봉틀로 소품 만드는 이야기, 예쁜 수입원단 이야기로 둘은 집에 놀러 가기로 약속할 만큼 금세 가까워진다. 역시 꽃을 애정하는 사람들은 꽃뿐만이 아니라 다른 공통분모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H로 말하자면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친동생 이상인 사이다. H가 아니었다면 올해도 100배는 힘들었을 거다. 늘 수업에 초대하고 싶었지만 카페 운영으로 바빠서 드디어 처음 왔다.
오늘도 평탄치 않다. 기관지염에 걸린 막둥이가 조퇴하겠다고 전화가 온다. 아이 때문에 약속을 깨지 않으려 아침부터 분주했을 텐데 그 와중에 예쁜 샌드위치와 빵을 6인분 만들어왔다. 집 모양 상자에 담아서. 트리 역시 아기자기하고 디테일 있게 만들었다. 나보다 100배는 세심한 H는 늘 내게 빵을 건넨다.
빵이 꾸준히 채워져 있는 우리 집에 디저트도 끊이지 않게 하는 마술사는 C님이다. 판교현대백화점에서 줄 서서 공수해온 에그타르트, 성수동 핫한 소금빵, 직접 농장에서 따온 샤인머스캣, 서울 3대 즉석떡볶이키트... 이런 진귀한 먹거리들을 C님의 회사와 집 사이에 우리 집이 위치한다는 이유로 자주 받는다. 우리 아들들은 '상현동 이모가 주차장으로 나오래'라는 얘기를 하고 나가면 현관 앞에 서서 기대감 가득 품고 기다린다.
트리를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나를 도와주신다. 누리려는 마음보다 보탬이 되고 싶어 왔음을, 회사에서 잠깐 나온 어려운 시간임을 안다. 가족과 지인들을 챙기는 분답게, 트리에 달린 곰돌이 한 마리 한 마리가 가족을 나타내서 다채롭다.
더 가까운 이웃 B님에게 받는 에너지도 빼놓을 수 없다. 현관문을 열고 일곱 발자국만 가면 B님이 산다. 이 거리에 그저 주변 얘기가 아니라 성장하고픈 꿈얘기를 하고, 나란히 앉아 글을 쓰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니 나의 인복은 감히 금메달이다.
고객과 계속 이야기하면서도 속눈썹을 예술로 붙이는 B님은 시종일관 분위기를 띄우는 중에도 1.7배 큰 특대형 트리로 재빠르게 완성했다.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패셔니스타는 역시 다르다. 트리에 레드소품을 과감하고 눈에 띄게 배치한다. 샵을 하루 비우고 오면 매출과 직결되는 걸 알기에 고맙다. 트리를 보는 고객마다 크리스마스를 느끼며 센스 넘치는 곳으로 기억하길 바라본다.
늘 오고 싶어 하던 글동무 L님은 휴직하자마자 클래스를 신청했다. 강사에게 이렇게 우선순위를 제일 먼저 내어주는 분이란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오늘도 나보다 먼저 와서 준비를 도와준다.
몇 년 전 드린 조그만 화분도 아직 잘 키우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주는 세심한 분. 보드라운 아이보리로 아담하게 만든 트리도 다정한 눈빛과 조심스러운 손길을 먹으며 오래오래 함께 하겠지. 현미경 들여다보는 연구를 하던 그녀가 낮이면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탐험을 마음껏 하고 밤이면 트리 곁에서 시를 쓰길, 5개월이 천천히 지나가길 소망해 본다.
이렇게 초대 클래스를 할 수 있는 건 A님 덕분이다. 감성 가득하게 꾸민 소중한 공간을 비용도 받지 않고 내어주신 우리의 산타. 출산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날에 세팅하고 깨끗이 치워주면서 허리를 붙잡으셨을 모습이 그려진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추운 날, 소중한 인연 얼굴 한번 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반짝거리는 트리를 보고 있자니 마음속 또 다른 빛들, 이번에 못 본 사람들이 떠오른다. 모두에게 '트리 같다'는 찬사를 바치고 싶어진다. 당신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빛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