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 의미 안목 편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주 아쉽고 미안하다. 내가 영상 찍는 동안 일행은 저만치서 기다린다. 뒤따라가다 보면 찍고 싶은데 지나쳐온 꽃이 생각난다. 사진이 꼭 남아야해서가 아니다. 내 친구 꽃과 반가워할 시간이 필요하다. 친한 친구가 우연히 저만치 보이는데 너무 바빠서 그냥 온 날 같다.
그러니 찍기 좋아하는 사람과 가면 마음이 편하다. 봄에도 가을에도 지윤 작가님과 화담숲에 함께 가는 이유다. 2주 전에 갔어도 또 가는 까닭이기도 하다. 마음껏 찍고, 서로 찍어주다 보면 40분 같은 4시간이 지나있다.
사진 찍는 동안도 코는 쉬지 않는다. 가을 단풍은 영상으로 볼 수 있지만 낙엽 냄새는 와야만 맡을 수 있기에. 부지런히 탐색하던 코끝에 낯선 자몽향이 감지된다.
"어머 이 향은 뭐죠?"
지윤 작가님이 손을 문지르며 말한다.
"제 핸드크림 향일 걸요?"
우리는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여고생들처럼 깔깔 웃는다.
숲에 간다면 핸드크림은 미리 바르길. 특급 호텔 뷔페에 가기 전에 배를 비워놓듯이. 다년간의 화담숲 경력자가 추천하는 향기를 순도 100%로 영접하려면 말이다. 고백하건대 나름 우아한 편인 플로리스트는 코 세척까지 야무지게 하고 갔다.
가을, 이라는 단어에 낙엽냄새만큼 어울리는 냄새가 또 있을까. 헌책방, 다락방, 할머니댁, 건초더미와 동류에 넣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의 냄새. 향기보다는 냄새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역설적 영광을 지닌 부류다.
화담숲이 아쉬운 게 딱 하나 있다. 낙엽을 하도 부지런히 치워두기에 낙엽냄새는 진하지 않다. 대신 은행나무가 길에 한 그루도 없다. 은행열매 냄새와 밟히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척 안전한 곳이다.
낙엽 냄새를 더 느끼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한 잎 한 잎 주워서 맡으며 가보자. 내리막길이라고 다 와간다고 빠르게 가면 안 된다. 섬백리향이 있기 때문이다. 식물이름에 '섬'자가 들어가면 울릉도에서 물 건너온 귀한 몸이다.
발 끝에 스치면 향이 백리를 갈 동안 남는다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리는 약 40km이니,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이 향으로 방향을 잡는다는 이야기가 끄덕여진다. 구름이 가득해서 달도 별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 익숙한 향이 바다내음을 넘어 코끝에 마중 나올 때 얼마나 반가울까. 꽃말도 용기, 희망이다.
몸도 마음도 가라앉기 쉬운 가을, 힘을 내고 싶다면 섬백리향의 응원을 충전하길. 분재 정원 중간쯤, 하얀 벤치 옆에 있다. 지피식물이라 땅에 붙어 자라니 눈높이의 땅에 심겨있다. 로즈마리와 비슷한 두께로 톡톡하면서 짧은 잎을 가졌다.
코만 가까이 가는 것보다, 손으로 만지고 손끝을 코로 가져가보자. 희망과 용기의 실체를 잡듯이. 모과와 로즈마리를 4:6으로 섞고 레몬즙을 두 방울 뿌린 향이 오래 남는다. 한번 맡으면 열손가락 모두에 섬백리향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질 거다.
시각은 사진과 영상으로 선명히 담아갈 수 있지만 향은 몸에 담아도 흐려진다. 워낙 꽃향기에도 까다로운 플로리스트는 향수로 만족이 되지 않지만, 향수를 지니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향을 품는다는 건, 그 향을 맡을 때의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지 않을까.
지윤 작가님이 최근 받은 영감을 나눠주자 내가 왜 이토록 향을 전하고 싶은지 가닥이 잡힌다.
"문화가 발달하면 가장 상위에 후각과 연결된 경험이 퍼진대요. 브랜딩 투어를 갔더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후각 경험을 돈 주고 해요. 향수를 향 자체보다 향에 대한 묘사 때문에, 그대로 상상하며 느끼고 싶어서 사고 선물하더라고요."
"저도 향을 정말 잘 표현하고 싶어요. 제 글을 읽으면 그 꽃 향기가 상상이 되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요. 세상에 이토록 차원이 다른 향이 있다는 걸 저만 알기엔 아까워요."
어쩌면 내가 글로 보여주고 싶은 건 향기 자체보다 향기가 주는 보이지 않아도 뚜렷한 응원, 가녀린 낭만, 현실적인 황홀 같은 것이겠지.
나무가 작가라면 어떤 글을 쓸까. 글감 많기로는 안동에서 옮겨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독보적 1위일 거다. 보는 순간 "아니 어쩌다가" 하게 된다. 총알이라도 맞은 듯 성한 줄기가 없다. 500살을 살아왔으니 왜란, 호란, 일제강점기, 6.25까지 보았으리라.
상처 많은 나무뿐이랴. 휘어진 나무도 사뭇 존경스럽다. 호기심 많은 내 인생을 나무줄기로 나타낸다면 얼마나 여러 갈래로 뻗고 구불거릴까. 나무 어르신을 보니 그것도 나름 멋이겠구나 싶어진다.
요즘 지윤작가님이 받기 시작했다는 새로운 요청이 기쁘다. 맞닿은 나무줄기 간증 같다.
"제 인생의 경험이 이렇게 통합돼서 쓰일지 몰랐어요. 진주목걸이에 꿰어진 진주들은 서로 닿지 않으니 저 쪽에 있는 진주랑 나랑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로 이어져 작품이 된대요."
이 숲이 이토록 정갈하게 아름다운 이유를 찾아보는 대화도 즐겁다. 건물, 모노레일, 기찻길, 파라솔까지 - 사람이 만든 것들은 오직 기와색과 하얀색뿐이다. 요즘 행사데코에서 계절감을 주기 위해 붉은 꽃을 블랙 화기에 꽂았는데, 다음에는 기와색 화기에 꽂아야지 상상한다. 이 노란색은 이 빨간색과 어울리는구나. 이렇게 넓적한 잎 옆에 기다란 잎이 멋스럽네. 이렇게 영감과 안목을 충전한다.
보이지 않는 손길들도 상상한다. 매일 길 위의 낙엽을 미리 줍고 작은 연못에 떨어진 낙엽까지 건져 올려 시냇물을 맑게 만드는 사람들, 벤치와 돌을 반질반질 닦는 사람들, 화담숲이 문 닫은 겨울에도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내고 손을 호호 불며 식물을 관리하는 사람들까지. 아름다움 뒤에는 늘 상처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손길이 있다는 걸 아니까, 동류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걸 보겠지. 보이지 않았으면 했던 지나온 길도 모아보면 꽤 괜찮을 거야. 어느새 나는 사진을 찍지 않고 있다. 손에 든 낙엽 몇 잎의 감촉, 향기, 나에게 스며든 말들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