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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콜 Jun 06. 2022

캐치프레이즈 오브 프라이드

프라이드 먼스 특집 (2) - 그런데 약간의 영어공부를 곁들인...

*** 개인적으로 번역을 하다 보니 주관이나 의역이 약간씩 가미되어 있다. 번역하지 않는 게 그 의미를 더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경우에는 따로 번역문을 적어두지 않았다.



# 0. 인생의 캐치프레이즈


나는 개인적으로 프라이드에 사용되는 테마 문구들을 좋아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내일의 무지갯빛 희망을 노래하는 가사처럼 낙관적일 때도 있고, 짧은 슬로건 속에 애환과 울분과 자긍심을 담아내기도 해서 그렇다. 사실 마음에 드는 캐치프레이즈를 정해두고 살면서 그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우리 삶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인상 깊게 본 퀴어축제의 문구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아무래도 대부분 영어로 쓰였다 보니 좀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약간의 영어공부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막상 쓰고 나니 퀴어뽕이 차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다.)



# 1. Every riot starts with your voice


내 브런치 소개 문구인 Every riot starts with your voice [모든 항쟁은 당신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2019년 베를린 크리스토퍼 스트릿 데이(이하 CSD*)의 50주년 기념 문구다. (*CSD는 프라이드 축제의 배경이 된 스톤월 항쟁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기념하는 축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프라이드 축제를 대신해서 혹은 프라이드 축제와 함께 열린다.)


짧은 문장 안에 통찰을 담아내기 위해서, 한국말로 된 슬로건에서는 조사 하나하나가 큰 역할을 한다. 영어 슬로건에서는 조사 대신 전치사가 큰 의미 차이를 만들어 내는데, 예를 들면 위의 문구에서 with의 쓰임새가 그렇다. 개인적으로 "당신의 목소리에서부터"라는 표현이 개인의 목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번역하긴 했지만, 영어에서 with는 "함께"라는 의미로, 이 문장은 목소리를 함께 내어 동조해달라는 뉘앙스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혐오 세력에 대항하는 시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구인 Hate can't dance [혐오는 춤을 출수 없다]라던지, 성소수자 시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Just) Be you [네 모습 그대로의 네가 돼], LA 프라이드에서 본 문구인 We're here, You get used to it [우리는 여기 있다, 당신이 그것에 익숙해져라], 캘로그의 프라이드 이벤트 패키징에 쓰인 Boxes are for cereal not people [상자는 시리얼한테나 필요하지 사람한테 씌우면 안 돼]까지, 프라이드의 묘미는 이렇게 재치 있고 지혜가 가득 담긴 문장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 2. 세계의 캐치프레이즈


도시별로 매년 프라이드마다 캐치프레이즈가 달라서 이들을 전부 하나하나 소개하고 싶지만, 프라이드의 역사가 긴 곳은 50년이 넘고 전 세계 200개 이상(공식 집계가 이 정도고 비공식까지 합하면 1000개는 넘을지도 모른다고)의 도시에서 축제가 열리다 보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문장들만 몇 개 꼽아 소개하려고 한다. 비영어권 국가의 프라이드는 슬로건도 자국어로 써졌기 때문에 영어권 위주로만 찾아보았다.


특히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압도적으로 많기는 한데, 둘이 프라이드의 양대산맥이라고 볼 수 있어서 그렇다. 뉴욕은 실제로 스톤월 항쟁이 일어난 도시라 그렇고, 샌프란시스코는 히피 문명의 발상지인만큼 일찍부터 프라이드가 시작되었다. 둘은 오랜 역사 덕분인지 단순하지만 임팩트 있는 문구들을 많이도 만들어냈는데, 개인적으로는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가 아주 캐치프레이즈 맛집이라고 생각한다.


1985년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 Honor our past, Secure our future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고, 우리의 미래를 지켜내자]

2001년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 Queerific [퀴어하게 만들어진 / 퀴어들로 가득한] - 영단어 퀴어에 접미사 -ific를 더해서 만들어낸 신조어다. 일상 대화에서 쓰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2005년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 Stand up, Stand out, Stand proud [일어나서 눈에 띄되 당당함을 잃지 않기]

2007년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 Pride, not prejudice [편견 대신 프라이드] - <Pride and prejudice, 오만과 편견>을 유쾌하게 오마주 했다. 앞의 Pride는 자부심 혹은 프라이드 축제 그 자체를 의미하고, 뒤의 프라이드는 그 정도가 지나쳐서 상대방을 쉽게 무시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2008년 샌디에이고 프라이드 : Live, Love, Be [살자, 사랑하자, 진짜 모습으로 존재하자]

2013년 말타 프라이드 : Lovs is love - 컬쳐클럽의 유명한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2014년 뉴욕 프라이드 : There's no place like home [내 집 만한 곳이 없지] - <The wiz, 오즈의 마법사>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로, 영화의 주인공 도로시를 연기한 전설의 주디 갈랜드*와, 어딘가 괴짜 같은 영화 캐릭터들, 그리고 영화의 대표 테마곡 Over the rainbow 때문에 오즈의 마법사는 프라이드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레퍼런스 중 하나다. (*1900년대 중반 미국 뮤지컬씬의 최고 디바 주디 갈랜드는 아버지와 두 번째, 네 번째 남편이 동성애자였고 그로 인해 기구한 결혼사를 갖게 되면서 성소수자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2016년 런던 프라이드 : No filter [필터 따위 필요 없다] - 처음에는 무슨 뜻으로 이걸 쓴 건지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 여기서 필터는 사진 보정 필터가 아니라 사회가 기대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양식, 혹은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드러내자는 의미도 될 수 있고, 필터를 거르지 않고, 즉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을 상징할 수도 있어서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있는 단어 선택이라고 보았다.


2016년 토론토 프라이드 : You can sit with us [우리 같이 앉자] -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를 향해서, 혹은 비성소수자가 성소수자를 향해서 건네는 연대의 의미를 지닌 문구다. 앉는다는 것이 지닌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알기에 "Sit with"라는 동사구의 사용에 만감이 교차했다.

2016년 뉴욕 프라이드 : Eqality needs you [이퀄리티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 - 우리가 이퀄리티를 못 가져서 안달 난 게 아니라, 되려 이퀄리티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우리가 없으면 이퀄리티도 없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문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만 바꿨을 뿐인데 이런 신박한 통찰이 탄생한다는 게 신기하다. 엉클샘이 등장하는 "We need you" 모병 포스터를 오마주해서 포스터를 만들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7년 런던 프라이드 : Love happens here [사랑은 지금, 이곳에서] - "Here"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공간적으로 이곳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시간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나타낼 수도 있어서 번역에 지금과 이곳에서를 동시에 사용했다. 또 "Happen"이라는 단어는 다른 유사한 의미의 동사들과는 달리 무언가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그렇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이곳에 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랑을 느끼게 될 거야"라는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아 좋았다. 물론 이건 내가 과장해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2018년 뉴욕 프라이드 : Defiantly Different [평범함을 거부하는 다름] - "Defiantly"라는 단어에서부터 자부심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프라이드 축제에 가장 걸맞는 슬로건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자와 다르다는 것을 배척당하고 놀림받는 이미지가 아닌, 같아지려는 노력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는 반항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서의 퀴어를 그려낸 문구. 오늘 나온 문구들 중에서는 단연 내 베스트 픽이다.



# 3. 올해의 캐치프레이즈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올해의 슬로건들도 살펴보도록 하자.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프라이드를 맞이하는 만큼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슬로건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서울 프라이드 (서울 퀴어문화축제) :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 - 성소수자들이 설 곳이 날로 줄어들고 있다. 코로나로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유명 활동가들이 연달아 목숨을 끊었다. 그러니 살자라는 말에 유독 무게가 실린다. 일단 죽지 않고 살아야 함께하고, 또 나아가니까.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 Love will keep us together [사랑이 우리를 함께하게 하리라]

뉴욕 프라이드 : Unapologetically us [죄송하지 않게도, 우리는] - 정체성에 대해서 사과하고 후회할 필요 없다는 뜻인 것 같다. Self-love가 강조되는 최근 2년 사이 탄생한 신조어 "Unapologetically"라는 부사어가 꽤나 강경한 어조로 느껴진다.

로마 프라이드 : Back to making noise [다시 시끄럽게 하자] - 코로나로 한동안 참았던 거 다시 거리로 나가서 다 풀자는 뜻인 것 같은데, 시끌벅쩍한 이탈리아인들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밀라노 프라이드 : Right into the squares [지금 당장 광장으로 / 권리를 광장으로] - 광장으로 달려가자라는 의미와, 권리를 광장으로 가져오자는 의미가 담긴 중의적 표현이다. 예로부터 광장이라는 공간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토론하고 정치하는 시민의 공간이었다는 점, 그리고 작년 동성애자 차별금지법 제정이 무산된 정치적 상황과 연관 지어보면, "지금 당장 이 안건에 대해서 논의를 하자"라는 의미처럼도 읽힌다.

파리 프라이드 : No more, no less [똑같이, 많이도 적지도 않게] -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권리를 그저 남들과 똑같이만 달라는 호소를 유명한 프랑스 숙어 속에 유쾌하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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