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큰 것들의 비애

호구는 진상을 낳는다.

by 조용해

지금은 모두 한 자녀 혹은 둘 많아야 가끔가다 세 자녀 시대지만 7-80년대만 해도 셋, 넷은 기본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꺼번에 좌라락 아이를 낳는 엄마들도 있지만 한 둘 낳고 나서는 더 낳을 것인가 그만 낳을 것인가를 고민하다 혹은 그만 낳으려다 피임에 실패해서 약간의 터울이 진채로 나머지 아이들을 낳곤 했다.


우리 집도 그런 케이스였다. 언니 둘을 낳고 '애 키우는 게 장난 아니구나'를 깨달은 엄마는 둘만 낳아 잘 키우려다 그래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욕심에 5년 후 나를 낳았고, 태동도 배 모양도 남달랐던 나를 아들로 홀딱 속아 다른 언니들은 다 집에서 낳다가 나는 종합병원에서 낳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낳아보니 역시 딸... 실망감을 달랠 길 없어 내 이름을 작명소에서 지어- 아들 낳는 이름으로-가며 또 한 번의 시도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름 덕분인지 우연인지 영원한 미스터리를 남긴 채 아들을 낳았고 그렇게 우리 집에는 애들의 두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름 하야 <큰 것들> <작은 것들>로 갈리는 우리는 큰언니와 작은 언니가 연년생으로 큰 것들, 나와 작은 언니의 터울이 5살 나는 관계로 연년생이었던 동생과 내가 묶여 작은 것들로 나눠지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내이름이 멀쩡히 있는데도 위의 큰것들은 나를 <쪼꼬미>로 부르고 있었다. 다 크고 보니 내가 딸들중 가장 키가 큰대도 불구하고, 지들 보다 훨씬 크구만, 나는 아직도 <쪼꼬미>로 불리고 있다. 억울.


큰 것들은 늘 작은 것들에게 져줘야 하고 양보해야만 한다는 불만을, 작은 것들은 뭔지 모험적인 것은 늘 큰 것들 차지가 되는 불만을 서로 질시하며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의 어드밴티지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역시 남의 떡이 그때도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공주병을 앓고 있던 큰 언니와 슈퍼 에고이스트 작은 언니의 캐릭터 덕분에 우리 집은 작은 것들- 동생과 나는 뭐 별로 이겨본 적도 양보받아 본 기억도 사실 가물가물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막내 삼촌네 가족이 여행을 오랫동안 가는 바람에 그 빈집에 노처녀 막내 이모의 보호 아래 친척 아이들끼리만 일주일 모여 놀기로 했는데 큰 것들은 갈 수 있었고 작은 것들인 동생과 나는 작다는 이유로 잘려서 그 재미있는 절호의 찬스를, 엄마의 잔소리가 없는 곳에서 일주일을 보낼수 있는 다시 없을 그 기회를 놓치고야 말았다. 10남매인 엄마의 외가 친척 언니 오빠들의 모임이었으니 한집에 한 명씩만 참가해도 열명이었는데 애를 많이 낳던 시절이라 참가했던 아이들이 족히 20명은 넘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재밌을 꺼야...순간 열 집의 작은 것들은 모두 땅을 쳤다.


우리 집의 경우 형편이 좋았던 관계로 그리고 큰언니께서 공주였던 관계로 동생들 때문에 어떤 것을 양보한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오히려, 우리 큰언니의 경우 동생들보다 많은 어드밴티지를 누렸으면 누렸지 손해를 본 적은 없다. 내 기억으로는 - 가난했던 셋째 삼촌네 경우, 가난한 가정형편을 고려해 큰 것들이 작은 것들을 위해 얼마간의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순서로는 큰언니가 동생들의 봉양을 나서야 했지만 어쩐지 그 집에서는 둘째 현경이 언니가 희생타로 나섰다. 자처했는지 떠밀렸는지는 모르지만, 하긴 그 일이 떠밀려서는 하기 힘든 일이니까... 현경 언니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어려운 가세를 위해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 언니가 버는 돈으로 큰언니인 화경이 언니가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아래로 동생이 둘이어서 그 동생들의 학비까지 대느라 언니의 희생은 몇 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면 누군가 하나 그런 식의 희생을 하면 집안에 의사라도, 법관이라도 하나 나올만하거늘 그 집에서는 누구 하나 공부를 특출 나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큰언니인 화경이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현경이 언니와 바통터치를 해주지도 않았다. 늘 학력 컴플랙스가 있었던 현경이 언니는 친척들과의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친척들의 행사에 큰맘 먹고 나온 언니에게 철없던 사촌 현지가 " 언니 중학교 밖에 안 나왔다며?"라고 진심 궁금해서 물어보는 통에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이 - 우리 외가가 모이면 보통 50명은 넘게 모인다- 일순간에 <얼음>으로 굳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언니를 다시 친척들의 행사에서 보지는 못했다. 언니의 소식은 외숙모를 통해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고마워 할줄 알았는데... 돈 범내 하고 외숙모를 시집살이를 시킨다거나 볼멘소리를 가끔씩 한다는 한탄이 주 테마였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알고 호구는 진상을 낳는다더니.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어 그렇게 희생을 했다면 응당 그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는 게 이치지만, 내가 본 봐로는 그 집 식구들 중 누구도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객관성을 가지고 본 내가 그렇게 볼 정도니 본인은 얼마나 억울할까?

지금 와 생각하니 딸을 그렇게 희생시키느니 엄마인 외숙모가 나서서 파출부라도 뛰어 아이들을 양육해야 했다. 하긴 셋째 외숙모는 외갓집에 어떤 행사가 있으면, 특히 그것이 노동을 요하는 경우, 늘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해서 큰 시누였던 엄마의 미움을 종종 샀다. 그 외숙모의 캐릭터가 그랬다. 본인만 위하는. 그 밑의 자식들의 고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삼촌이 멀쩡이 살아 계신대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언니는 언니의 인생 전체에 걸쳐 친정을 향해 희생을 일삼았다. 친정을 위해, 돈을 위해,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어떤 늑수구래한 공장 사장의 후처로 들어가서 남의 애를 키우며 거기서도 언니 특유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자기 아이는 낳지 않은 채 친정식구들의 볼모가 되어 친정 생활비를 댄다는 명목 아래 떳떳지 못하게 아내 겸 일꾼의 처지로 처녀의 몸으로 남의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살았다. 배은망덕한 그녀의 남편은 바람을 펴서 언니를 버림으로써 언니는 후에 완전히 혼자로 남았다. 물론 친정식구 누구 하나 언니에게 고마워하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언니에 노후에 대해서 그많은 식구들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아무도 도움을 주려하지 않았다. 역시 호구는 영원한 호구로 끝나는 거였다.



우리 집 앞 극장 앞에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거기도 우리 집처럼 애들이 넷이었는데 큰언니는 우리 큰언니와 동갑, 작은언니는 우리 작은 언니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기동창, 아래로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들 그리고 내동 생보다 어린 여자아이 이렇게 아들 하나 딸 셋. 조합도 우리 집과 비슷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엄마도 그 시대에 노처녀로 아빠랑 결혼을 겨우 했다고 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집의 엄마 아빠는 결혼이 늦었다던 우리 엄마 아빠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다. 그 집 아이들은 우리 집 애들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당돌하고 당찼다. 그에 비해 그 집 큰언니의 분위기는 좀 달랐다. 낯빛이 파리해 보이고 어쩐지 늘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딴딴하고 억쎄 보이는 나머지 형제자매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늘 기운이 쫘악 빠진 채로 건들면 특하고 쓰러질 듯 가냘펐고 입성이 나머지 아이들과 다르지 않는데 웬지 기품이 있었다. 좀 슬퍼 보였다. 그 집 언니의 건강상태를 눈여겨보던 우리 엄마가 가겟집 아줌마에게 애 좀 잘 먹이라고 곧 쓰러질 것 같다고 염려하자 원래는 건강했는데 고전무용을 하고 싶어 하던 아이를 동생들도 많은데 뒷바라지를 못해줄 것 같아서 무용을 못하게 했더니 그 뒤부터 저렇게 시름시름 앓는다고 고백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고전무용을 전공했더라면 꾀나 잘 아울릴 것 같았다. 파리하게 하얀 얼굴이나 말라서 더 도드라져 보이는 긴 팔다리로 고전 무용을 했더라면... 언니의 슬픈 얼굴과 살풀이 춤이 근사하게 어울릴 것만 같았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 언니는 당시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우리는 우울증의 증상도 병명도 잘 모르던 시대였다. 그렇게 병명도 모른 채 각자의 사연들로 사람들은 제각각 시름시름 앓았다.


우리 큰언니가 한 낙서는 특별히 예뻤다. 단지 낙서였는데 내 노트 옆구리에 언니가 무심코 한 낙서를 내 친구들은 예쁘다고 감탄했다. 그걸 내가 한 줄 알고 나를 미화부장으로 추천한 적도 있었다. 큰애가 잘되야 줄줄이 잘된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던 엄마는 언니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인생 목표였지만 애당초 성적 때문에 좋은 대학을 갈 수 없는 것이 자명해 지자, 언니의 특기를 살려 미술을 시키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언니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유는 "하기 싫다."였다. 누군가 언니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면 " 난 원래 그래."로 말문을 막으며 똥고집이 나름 유명했던 언니를 엄마는 끝내 설득하지 못했고 언니는 그저 그런 대학에 겨우 합격했다. 그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언니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줄줄이 동생이 있는 처지에 그 당시 돈 먹는 하마였던 미대를 홀랑 갈 수 없었노라는 큰언니의 고백에 우리들 사이에선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설마... 우리 집은 꾀 여유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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