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8' [/]충청도

서해 바다는 조금 더 포근하다

by DHeath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시작한 일들이 하나둘씩 끝을 맺었다. 여전히 여름은 쨍한데, 기대도 바람도 갖지 말자던 다짐은 여전하지 못해 엉망이 되었다. '예심에만 오른다면, 참가상이라도 받는다면' 같은 저렴한 희망은 당연하게도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자꾸만 작아지고, 흩어져 사라져 가는 기분이 들어서… 가라앉다가… 가라앉다가…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떠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떠났다.

KakaoTalk_20220808_161355641.jpg 청보리밭이었던 어느 언덕

어릴 적 경주의 해변에서 일몰을 기다렸던 바보 같은 때도 있었다.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던 해를 찾기는커녕 발갛게 타오를 하늘만 기다리다가 불쑥 찾아온 밤을 맞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이번에는 의미 없는 기다림도, 더 이상 귀엽지 않은 부끄러움도 싫어서 서해로 향했다. 태안 바다로 가는 길에 먼저 보령의 어느 언덕으로 향했다. 좋아했던 드라마에서 이별한 연인 둘이 다시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원래 청보리밭이었던 그곳에는 소밥이 될 수단그라스(논 마시멜로우의 재료)가 무성히 자라 있어 드라마 속 느낌은 나지 않았지만, 그 장면의 배경음악과 대사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니 그저 좋았다.

KakaoTalk_20220808_161224872.jpg 신두리 해안사구

다음으로 향한 곳은 신두리 해안사구였는데, 모래톱에는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어서 모래 언덕인지 동네 언덕인지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모래언덕이 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해풍이 기분 좋게 불었다. 그러나 그런 해풍마저도 이겨낼 수 없는 한여름의 더위 아래, 땀으로 샤워를 하고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다시.

KakaoTalk_20220808_154035141_01.jpg 태안 학암포

다음 행선지는 학암포 해변이었다. 최근에 인상 깊게 본 박찬욱 감독의《헤어질 결심》에서 나온 해변은 강원도 삼척의 부남 해변, 충청도 태안의 마검포·학암포 해변을 잘 섞어서 만든 가상의 해변인데, 뜬금없이 생각나서 슬쩍 다녀왔다. 물론 탕웨이님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보령.

KakaoTalk_20220808_154035141_02.jpg 보령 대천해수욕장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 멀리 석양이 보였다. 밤이 돼 도착한 대천 해수욕장에서 저녁을 먹고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익숙하지만 또 다른 기분으로 마셨던 차가운 에스프레소가 인상 깊었다. 축제 기간이라 인파가 조금 있었지만 평일이어서인지 우려한 만큼까지는 아니었다. 바닷가를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른쪽이 가득 찬 반달이 있었다.

서해에는 일몰도 있었고, 넓게 펼쳐진 갯벌도 있었고, 변함없이 몰아쳤다 빠져나가는 파도도 있었다. 썰물 때에 드러나는 바다의 속살이 많아서 서해는 동해보다 조금 더 포근해 보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실컷 걷다가 일렁이면서 나는 다시 떠나왔다. 죽음이 삶보다 더 자연스러운 상태라던 어떤 학자의 말이 떠올랐던 순간도 있었지만, 우연히 살게 된 김에 우연히 잘 살아보잔 마음도 먹었다.

작은 변화는 '다시'에 좋은 재료가 된다. 다시 읽고, 다시 쓰고, 다시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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