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잊었던 소중한 나의 이야기

by 미련곰탱이

달그락달그락. 곰탕 뚝배기를 닦는 소리에 덜덜거리며 울리는 전화기를 흘깃 보니 늦은 저녁시간에 엄마의 전화였다. 저녁 알바도 힘든데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을지 고민하던 중 전화는 끊어지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는데, 다시 울리는 전화...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고무장갑을 내리고 부랴부랴 전화를 받으며 "왜~~"하며 짜증을 낸다.

수화기 너머 기다렸다는 듯이 "어떡하니~"로 시작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파킨슨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둘째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떡하긴 내일 반차라도 내고 다녀와야지.."간단한 엄마와의 통화 후 기억 저편에 있는 고모와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담배를 피워 물며,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니, 새벽에 일어나 쏟아지는 잠을 참고, 두 시간에 걸친 출근길 버스에서 목각인형의 머리처럼 흔들흔들 거리며 잠에 취해 사무실에 출근해서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직장인의 모습에서 퇴근 후에는 국밥집에서 뚝배기 설거지를 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정말 퇴근은 새벽 2시에나 하루의 긴장을 풀 수 있는 다람쥐처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세 아이의 아빠였다.

지난 시간 고모와의 추억조차 여유 있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죄스러움과, 그렇게 조카라고 끔찍하게 위해주던 은혜에 보답 한번, 병문안 한번 가보지 못했던 죄책감이 담배를 피우는 내내 떠나가지 않았다.


어김없이 아침은 밝고 출근하며, 오늘은 반차를 내야 한다는 생각과 부의금은 얼마를 해야 하나라는 고민 속에 당장 장례식장으로 가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속에 오전일과를 마무리하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대중교통에 몸을 실었다.

분명히 oo병원 장례식장 2호실로 찾아갔는데, 빈소에는 상주들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아이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가 눈에 띄어 보니 고모의 막내아들, 사촌형의 아들이었다. 처음 얼굴을 본 것인데도 기억저편 어렸을 때 장난꾸러기 막내형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안녕, 어른들은 모두 안 계시네..", "예, 지금 모두 밑에 내려가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나니, 지금 고모의 마지막 모습을 뵈러 내려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니?"라는 질문에 내 예상과 같이 막내형의 아들이었고, 상주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나마 어린 시절 형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고모의 영정사진은 몸이 불편할 때 찍으셨던 사진인지, 내 기억 속에 있는 세련되고 멋쟁이 고모와 너무 다른 모습에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참에 상주들이 빈소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씨가 여리고 착했던 큰형, 항상 어른 같았던 둘째 형, 내가 제일 좋아하고 친구처럼 대해주던 막내형까지..

지금은 오십이 훌쩍 넘은 영락없는 아저씨의 모습이지만 형들을 본 그 시간부터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되었다.


그 순간, 먼지 낀 책장 속에서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명절이 되면 고모는 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집에 들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고모네 집에 가고 싶다.’

고모가 돌아가려 하면 나는 어김없이 울며 매달렸고, 엄마의 제지에도 소용없었다. 나는 울음을 터뜨린 채 신발을 신으며 고모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막내형은 늘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나 여기 며칠 더 있을게. 너랑 좀 더 놀고 갈게.”

그 말 한마디면 울음이 뚝 그쳤고, 나는 막내형의 손을 붙잡고 세상이 다 내 것인 듯 신이 났다.
형은 몇 살 위였지만 나와 마음이 잘 통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집안 곳곳을 탐험하는 놀이까지, 형과 함께라면 하루가 짧았다. 형은 우리 엄마, 그러니까 외숙모를 유난히 따랐다.

“외숙모, 떡볶이 너무 맛있어요.”
“제가 설거지 도와드릴게요.”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 옆에서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던 형은, 마음 씀씀이도 고왔고, 누구에게나 살가운 성격이었다. 그런 형 덕분에 명절은 더 특별했다.

형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나는 빠짐없이 짐보따리를 챙겼다. 나도 함께 고모네 집에 가겠다고 나섰고, 엄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착한 고모집은, 내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항상 반듯하게 정돈된 거실,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 밝은 조명 아래 은은하게 빛나던 마루.
무엇보다 고모부는 나를 무척 예뻐해 주셨다.
“어이구, 왔니? 그냥 내 아들 할까?”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따뜻한 느낌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림을 잘 그렸던 큰형은 나를 위해 직접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주곤 했다. 반짝이 풀과 색연필로 그린 산타와 눈송이, ‘메리 크리스마스’라 적힌 반듯한 글씨.

나는 그 카드가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고, 지금도 서랍 어딘가에 한 장쯤은 남아 있을 것 같다.

밤이 되면 셋 다 나와 자겠다고 형들끼리 다퉜다.
누구 품에 안겨 잘지는 늘 순서를 정해야 했고, 나는 그 다툼 속에서 기분 좋게 잠이 들곤 했다.
형들과 함께한 밤은 따뜻했고, 안전했고, 세상에서 제일 포근한 시간이었다.

고모네 형들 방엔 낯선 기계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턴테이블이었다.
크고 둥근 판 위에 검은 LP판을 조심스레 올려놓으면, 바늘이 닿는 순간 작은 사각거림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치 세상에 없던 문이 열리는 기분.
나는 그걸 형들과 함께 듣는 게 마냥 좋았다.

저녁이 되면 라디오를 틀어 놓고 셋이서 이어폰을 나눠 끼기도 했다.
형들이 좋아하던 가수, 따라 부르던 노래, 그 모든 것이 내겐 어른스러운 것들이었다.
나는 형들처럼 멋진 형이 되고 싶었다.
큰 형처럼 진지하고, 둘째 형처럼 어른스럽고, 막내 형처럼 따뜻한 사람 말이다.

그중에서도 큰형은 미대를 꿈꿨다.
누구보다 그림을 잘 그렸고, 낙서처럼 그린 연필 선 하나에도 이야기가 살아 있었다.
하지만 고모부는 큰형이 첫째라는 이유로 보다 '안정적인 길'을 원하셨다.
경제학과로의 진학.
큰형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고, 그날 밤 고모집 쓰레기통에 구겨져 있던 연습장 뭉치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형, 이거 왜 버려?”
“그냥… 이제 필요 없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형의 눈빛은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그런데도 결국 형은 시각디자인과에 합격했다.
기뻐했지만, 그 기쁨 뒤엔 마음 한구석의 무거움이 늘 함께였다.

둘째 형은 사회학, 막내 형은 체육교육과를 목표로 했다.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형들은 늘 나를 챙겨줬다.
하지만 나 역시 조금씩 고학년이 되어가며, 그들과 보내는 시간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함께 듣던 라디오 소리도, 밤마다 쟁탈전이 벌어지던 잠자리도 점점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막내 형이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괜히 서운했고, 속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형이 짐을 싸는 모습을 보는 게 견딜 수 없이 싫었다.
함께 놀았던 동네 골목, 형의 체온이 남아 있던 베개, 그 모든 것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잘 다녀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형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그 웃음은 너무 익숙했고,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그날따라, 형이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유독 길게 남았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도 함께 뒤돌아 서는 듯했다.


그렇게 막내 형의 입대 뒷모습을 기억하는 순간,
나는 다시 한참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
나는 1974년생이었고, 그 시절엔 학교라는 공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작고 단단한 세계'였다.

그 세계 안에서 선생님은 절대적인 존재였고, 친구들과의 서열은 때로는 집안 형편이나 부모의 직업에 따라 나뉘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부당한 일이 많았지만, 그땐 그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국민학교 4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학교에서 '반공 시 백일장'이 열린다는 공지가 있었고, 선생님께서 내 글을 반 대표로 추천하셨다.
그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굣길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가 자랑했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 우리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 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도 뭔가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너, 그 시 어디서 본 거지? 책에서 베낀 거잖아.”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 친구들이 그러던데? 그래서 ○○를 대표로 나가기로 했다.” 그 친구의 엄마는 학교 육성회장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 어떤 책도 보지 않았고,
그 시는 분명히 나의 진심으로 써낸 글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은 단호했고, 더 이상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교단에서 내려왔다.

뒤늦게야 알게 됐다.
그 친구가, 하교 전에 선생님을 찾아가 내 시가 표절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그 일로 결국 대표가 바뀌었고, 선생님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친구의 말을 믿은 거였다.

그날 이후, 나는 글을 써서 발표하는 일이 두려워졌다.
내가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도, 어떤 아이는 이름 석 자와 부모의 직책만으로 더 많은 기회를 받는다는 걸 너무 일찍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때 그 선생님의 얼굴.
아무런 확인 없이 한 아이의 자부심을 짓밟은, 그 무심하고 권위적인 표정.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상처는 흐릿해지지 않았다.
내가 내 아이들을 키우며, 단 한 가지는 꼭 지키고 싶다고 다짐하게 만든 원점이었다.

절대로 불공정한 기준 아래에서 아이가 상처받게 두지 않겠다고.
작은 정의라도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집과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다시 뚝배기를 닦는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그때의 나를 안아주듯 내 아이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모든 선생님이 그러셨던 건 아니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전혀 다른 분이셨다.
내가 공책에 틈만 나면 끄적이던 글들을 유심히 지켜보시던 그 선생님은 어느 날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ㅇㅇ이는 글 쓰는 걸 참 좋아하는구나. 소년동아일보 소년기자로 추천해 줄까?”

그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정말 내가 그런 걸 해도 되는 걸까?’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지만 그 말 자체만으로도 나는 이미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학교 꽃길’이라는 짧은 기사를 써서 제출했고, 놀랍게도 그 기사가 실제로 신문에 실렸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내 기사를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셨다.
“너희들도 한번 써보면 어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단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나에겐 커다란 용기가 되었고,
세상에 내가 쓴 글이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첫 순간이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누군가 나의 가능성을 믿어준다는 것,
그 믿음이 한 아이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가끔은 노트북을 펴고 짧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때 그 봄날, 나를 처음 ‘작가’라고 믿어주었던 선생님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고, 친구들 앞에 서는 일도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신문기사 한 편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용기'라는 씨앗을 싹 틔워준 건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하나 더 기억나는 귀여운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나는 나름대로 노래도 꽤 잘 부른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아 KBS 동요대회에 응모했는데, 그때 나는 정말 순수하게 믿었다.
"본선에 올라가면 텔레비전에 내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말이다.

예심날, 나는 씩씩하게 예심실로 들어갔다.
밝게 인사를 하고, 반주가 시작되자
“가슴을 펴고~”
막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래 됐어요. 다음!"

요즘 말로 하면 광탈, 아주 빠른 탈락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나와 함께 가준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KBS 본관 앞에서 종이컵에 물을 부어 만든 사발면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날 먹은 사발면 맛은…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았다.

‘아, 텔레비전은 멀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교회 성가대에 도전했다.
주일학교 어린이 성가대 오디션에 떨리는 마음으로 참가했고,
결국 성가대원이 될 수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꿈을 이룬 거 아닐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작지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있었고,
누군가 그 소리를 들어주는 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