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학창 시절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교복을 처음 입던 날, 거울 속의 내가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어른이 된 것 같아 으쓱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매 시간 다른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고, 책상 위에는 시간표대로 쌓인 교과서들이 놓여 있었다.
자율활동이나 동아리 같은 이름도 낯설었고, 복도를 걸을 땐 괜히 어른인 척,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기도 했다.
아직 중학생일 뿐인데, 우리는 스스로 다 컸다고 믿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스스로를 “ET라고 불러도 된다”며 웃던 선생님은 미혼이셨고, 대학생 같은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특별활동 시간엔 통기타반을 운영하셨는데, 사실상 선생님이 기타를 치시고 우리는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었다.
처음 배운 노래는 <아침이슬>
그 잔잔한 선율을 따라 부르며, 나는 이유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햇살이 가득 들어오던 교실과 선생님의 기타 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는, 이유 없이 선생님이 참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난생처음 하객으로 결혼식장에 갔다. 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웃던 선생님의 모습은 교탁 앞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고, 너무나 예뻤다.
식이 끝난 뒤 단체로 찍은 기념사진 속에서, 나는 수줍게 웃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 특유의 부드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 사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끔 그때가 그리워질 때면, 문득 떠오른다.
신혼여행을 다녀오신 뒤, 선생님은 나와 친구들을 신혼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그날의 점심 메뉴는 카레라이스.
우리는 재료를 썰고, 냄비를 저으며 웃었고, 선생님은 마치 수업하듯 카레 만드는 법을 열정적으로 알려주셨다.
“양파는 먼저 볶아야 해. 그래야 단맛이 나거든.”
그날의 카레는,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요리를 배웠다’고 느낀 순간이었고,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따뜻함을 배운 날이었다.
학교와 집은 가까웠다.
방학 중에도, 담임선생님이 당직을 서시는 날이면 나는 종종 학교에 놀러 가곤 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책을 읽고 계셨고, 나는 옆에서 장난을 치다가 결국 우동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그 우동은 [장터국수]에서 사 오신 것이었는데, 뜨끈한 국물과 면발의 쫄깃함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요즘은 보기 힘든 그 매장을 스치듯 볼 때마다, 그 시절 선생님과 나누었던 우동 한 그릇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은 늘 자율성을 강조하셨고, 우리는 1학년 마지막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작은 공연을 준비했다.
교실 책상을 앞으로 모두 밀어 무대를 만들고, 대본을 쓰고, 역할을 나누고, 웃으며 연습했다.
공연 날, 선생님은 조용히 뒤쪽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날의 그 미소, 그 분위기, 우리 반의 들뜬 에너지… 모두 지금도 마음 한편에 고이 남아 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이 끝났다.
어쩌면 그 시절의 작고 사소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조용히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통기타 소리, 카레 냄새, 우동 한 그릇, 교실 무대 위의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ET 선생님의 부드러운 눈빛.
그 모든 것들이 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좋았던 담임선생님과도, 통기타 소리와도, 장터국수의 국물 맛과도 이별을 했다.
2학년이 된 나는 그냥 신나기만 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신바’—신난 바보.
까불기도 많이 까불었고, 친구들과 장난도 늘 끊이질 않았다.
공부는 둘째치고 매일이 재밌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어느 날, 우리 반에 교생선생님이 오셨다.
물리 과목을 담당하셨던 김○○ 선생님.
단정한 긴 생머리에 부드러운 말투, 예쁘신 분이었다.
내겐 사촌 누나들이 꽤 나이차가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꼭 현실 속 ‘누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장남이었기에, 그 존재가 더 새롭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선생님 눈에 띄고 싶어서 일부러 더 떠들고, 질문도 하고, 심부름도 척척 해냈다.
돌이켜 보면 꽤 귀여운 짓이었는데,
그때는 나름 진지하게 “선생님이 나를 기억해 주셨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한 달 남짓한 교생 기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작별 인사를 하던 날,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게 작은 종이쪽지를 건네셨다.
그 안에는 선생님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쉬는 날 놀러 와. 맛있는 거 해줄게.”
선생님은 웃으며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멋을 부려,
드디어 그 주소를 들고 선생님 집으로 갔다.
그날은 모든 것이 특별했다.
선생님이 직접 차려주신 음식도,
그 집의 공기마저도 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누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 나이의 나에게는 굉장히 큰 위안이었다.
중학교 시절, 우리 반 반장은 참 똑똑했다.
공부도 잘하고, 항상 선생님들께 칭찬받던 친구.
박○○—이름이 나무를 닮아 나는 장난 삼아 “야, 나무야~” 하고 부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관심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 좋아하거나 궁금한 사람에게는 괜히 더 짓궂게 굴기도 하니까.
그 애가 웃으면 괜히 기분 좋고, 나를 한 번 더 봐주면 혼자 의미 부여하고...
어린 나는, 그 마음을 ‘장난’으로 포장해서 겨우 표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네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형편이 괜찮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집에 컴퓨터가 있었으니까.
운영체제는 DOS, 저장은 플로피 디스크—그 시절 컴퓨터는 정말 낯설고도 멋진 세계였다.
난 컴퓨터를 하나도 몰랐고, 그래서 더 배우고 싶었다.
마침, 내 친구 광희는 집에 컴퓨터가 있었고 형님이 컴퓨터를 엄청 잘 다루셨다.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광희네 집에 들락거리며, 열심히 컴퓨터를 배웠다.
터미널에 명령어 치는 법, 디스크 넣고 파일 여는 법...
이제 나도 컴퓨터 좀 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그 반장이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 줬다.
그 집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난 정말로 멋져 보이고 싶었다.
모니터를 보며 침착한 척 명령어를 입력하고, 자신만만하게 이 파일, 저 프로그램을 실행해 보였다.
그날, 내가 또 하나 보여준 건 피아노였다.
어릴 적 막내 고모에게 손가락을 맞아가며 배운, 달달 외운 단 한 곡.
다른 건 아무것도 칠 줄 몰랐지만, 그날은 딱 그 곡 하나면 충분했다.
떨리는 손으로, 익숙한 멜로디를 조심스럽게 눌러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귀엽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사이에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좋아 보이고 싶고, 그래서 안 하던 컴퓨터를 배우고, 겨우 한 곡 외운 피아노를 연주하며 내 나름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누군가를 생각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해본’ 그 감정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중학교의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매 순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멋져 보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 마음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조금씩 키워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