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사카모토 류이치를 보내며
저의 10대는 이제는 낯선 단어가 된 ‘카세트’와 ‘워크맨’ 시대입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려면 앨범을 사거나 매체(TV, 라디오)에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궁색한 용돈의 10대라면 라디오 앞에 앉아있다가 원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재빠르게 녹음 버튼을 눌러가며 자신만의 믹스를 만들어 가지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각자가 좋아하는 가수와 앨범, 믹스 테이프를 소중히 생각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디지털 음원과 스트리밍 서비스의 발전으로 100년 전의 음악이든 이미 몇십 년 전에 사망한 뮤지션의 음악이든 약간의 검색으로 얼마든지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더 이상은 특정 뮤지션의 앨범을 사모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운 좋게도 일생의 주기에 맞춰 이런 일련의 변화들을 따라가고 있고 충분히 영위하는 세대임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 한 켠에서는 편해지는 만큼 소중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어느 시점부터는 내가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죽음이 예전처럼 애달프지 않습니다. 디지털 데이터 안에서는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영원한 헤어짐의 기분이 들지 않는 까닭입니다. 적당한 검색어 몇 개만 떠올릴 수 있다면 원하는 정보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시대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많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을 잊고 살게 됩니다. 열렬히 사랑했던 예술가의 이름이 잊혀가지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것들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오래된 것은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을 테니 그건 그때가서 고민할 일이었죠.
제가 어릴 적 듣던 리스트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것에 당황하고 있을 즈음, 제가 좋아하던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의 별세 소식과 사후 발간된 그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독서에 부담은 없지만 생각보다 꽤 두꺼운 책입니다. 이런 책은 나눠 읽어야 하는데 다행히 소단원으로 나눠진 글이라 그런 면에서는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회고는 큰 틀에서의 시간의 순서를 따르며 진행되지만 자세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현재와 먼 과거, 비교적 가까운 과거와 내일을 불규칙적으로 이동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을 뚜렷이 앞둔 사람의 과거 회상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수많은 일들이 떠오르고 회한과 슬픔, 만족과 행복의 만감이 뒤섞이는 중에 과거의 일을 일목요연하게 시간 배열하는 것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비현실적이니까요.
기억나는 대로 흘러가는 화자의 고백은 생각보다 차분하지만 많은 감정이 압축되어 있고, 때론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조용한 독백입니다. 겸손하거나 배려 깊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직설적이죠.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어떤 부분에서는 그동안 몰랐던 그의 오만함과 무례함에 실망하기도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의 열정과 고집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숨겨지지 않고 숨길 생각도 없는 강렬한 반골기질은 아마도 그의 성향과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또 다른 수식어입니다. 기질에서 비롯되었을 사회운동가로서의 시대정신과 행동하는 적극성은 충분히 높이 살만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뉴에이지 뮤지션으로 알려진 그가 치유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에서는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병환 또는 노화의 영향으로 삶의 태도가 변화되고 그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는유연성과 삶의 마지막까지 예술 창작자로서의 자유로움과열의를 지켜내는 의지는 존경받아 마땅했습니다. 문체가 단정하고 침착하지만 그것이 작가 본인의 것인지, 번역가의 것 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깔끔하게 읽히고 명확하게 이해되는 문장이어서 읽기 수월한 점이 좋았습니다. 원래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다행히 특유의 산만함이 덜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문학적 소양이 높은 전문 작가는 아니어서 유려한 문장이나 술술 읽히는 화려한 필력을 가질 리도 만무하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음악을 들었는데, 한참을 괜찮던 마음이 책의 마지막 즈음에서 Piece for Illia에 도달해서는 갑작스레 감정과 눈물이 울컥하는 바람에 힘들었습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더 나쁘게 발전된 무책임함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든 그도 완전히 고결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 책은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여 칭송하거나 단죄하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고 또한 문학적 가치로 평론해야 하는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남들의 3배’에 비유될 만큼 그의 인생을 충실히 살았고, 어떤 생각과 어떤 자세로 살아왔는지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했을 뿐이니까요. 회고(回顧)라는 말은 단순히 뒤를 돌아본다는 뜻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이미 충분할 만큼의 감정적 해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저 마지막까지 창작의 열정으로 허위허위 손 저으며 아쉬워했겠지요. 그러니 굳이 그를 평가하거나 그가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어느 침대 옆에 앉아 나이 많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그의 남은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시대를 걱정하고 인간을 사랑했던 예술가 사카모토 류이치에 대한 저의 애정입니다. 한때는 사회적 소임을 다한 예술가의 마지막은 Israel Kamakawiwo’ole(A.K.A Bruddah IZ)의 장례식처럼 수만 명의 조문객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자의 죽음엔 적합한 헤어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저의 어리석은 객기일 뿐이었고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공평하다는 것을 깨닫는 중입니다. 다만 누군가의 플레이 리스트의 그의 곡이 남아있는 한, 우리가 좋아했던 또는 사랑했던 예술가의 죽음이 쉽게 잊히지 않길 바랍니다. 데이터의 홍수에 뒤섞이거나 파묻히지 않고, 오랫동안 또렷하게 기억되길 바랍니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