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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담 Mar 05. 2023

평창 올림픽에서 직접 만든 관광책자를 나눠 주던 날

2018년, 한국은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라는 경사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1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본격적인 입시를 앞두고 괜히 심란한 마음에 뉴스를 보고 있었다. 우연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로 인한 경제적 효과에 관한 보도가 나왔다. '관광 산업 활성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TV 소리가 더 또렷해지는 듯했다. 여행을 좋아했고 관광학도를 꿈꾸기도 했던 터라 관심이 갔다. 이내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내가 하고 있을 일이라곤 고작 '공부'라는 생각에 갑갑함이 몰려왔다. 이 지구촌 축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에 골똘히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올림픽을 위해 한국을 방문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 책자나 영상을.


나는 무언가를 기획하고 창작하는 과정에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따라서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여정이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입시가 코 앞인 학생 신분으로 해내기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관련 상품이 쏟아질 것이 뻔했지만, 그 주체가 평범한 대한민국의 학생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침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던 고향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곧바로 고교 연합 동아리를 창설했고 각자의 인맥을 끌어모아 전국의 학교들에 연락을 돌렸다. 고등학생들이 자주 쓰는 입시 커뮤니티에 모집 공고를 올리기도 했다. 워낙 특별한 이벤트를 겨냥한 프로젝트여서 인지 참가를 희망하는 100명 남짓의 학생들이 금세 모였다.


 디자인을 잘하던 친구에게 부탁해서 만든 표지. 한국적인 멋을 살리기 위해 전통 조각보 디자인을 활용했다.

먼저, 영상 제작과 책자 제작, 그리고 번역 및 책자 디자인으로 작업을 크게 분류했다. 책자의 경우, 각지의 학생들이 자신의 지역의 관광지를 직접 선별하고 소개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학생들이 글을 작성해서 보내오면 외고나 국제고 학생들이 이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총 7개의 언어였다. 끝으로, 완성된 글과 수집한 사진들로 책자를 편집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책자를 가지고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 현장에 방문해 외국인들에게 직접 배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업과 병행하며 작업하다 보니 데드라인을 넘기는 학생들이 허다했고, 저작권 문제나 변역의 정확도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예상보다 많았다. 게다가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의 협업이었고, 당시 슬랙 같은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도 없었던 터라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연락이 오고 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인쇄를 담당했던 학교가 배포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인쇄가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나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는 분명한 희열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서로의 얼굴도 모르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꽤 돈독히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서로를 믿었기 때문일 테다. 과열된 한국 입시 경쟁을 해내는 와중에 우리가 써 내려간 것은 다름 아닌 '협력'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의 끝을 멋지게 맺는 것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유일한 걸림돌은 삼백만 원 상당의 책자 인쇄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사비로 해결하기엔 큰 액수였으므로 인쇄를 포기하고 다른 배포 방식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컸던 나는 다소 무모한 방법이지만 세종특별자치시 교육청의 소통담당실에 불쑥 연락을 드렸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모인 학생들이고, 결과물이 무엇이며, 이 책자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소상히 설명드리고 인쇄비 지원을 부탁드렸다. 다음 날, 교육청 관계자분이 우리 학교로 찾아오셨고 간단히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이내 따뜻한 격려의 말과 함께 인쇄비 지원을 약속받았다. 아마 94명의 학생들의 진심이 전해졌을 테다. 그렇게 2018년 3월 9일, 우리는 완성된 책자를 들고 평창 패럴림픽 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완성된 책자를 실은 가방, 함께 작업했던 후배들을 데리고 평창으로 갔다.

개막식 행사가 열리는 평창올림픽스타디움에 도착하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였다. 평창의 장엄한 설산을 구경할 새도 없이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책자를 꺼내 들었다. 배포 방식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지나가는 외국인을 붙잡고 우리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그들이 원하는 언어의 책자를 드렸다. 폴란드, 호주, 미국, 프랑스,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이 올림픽 시즌에 평창을 찾은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그들과 소통하는 과정은 즐겁다 못해 경이로웠다. 다짜고짜 다가가 책자를 건네면 그들은 흥미롭다는 듯이 받아 들고선 책자 속 내용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럼 우리는 아주 신이 나서 열심히 답을 해드렸다. 책자를 보며 환하게 웃는 외국인들을 보고 있으니 그간의 노고가 아주 값진 것이었음을 다시금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그들의 '한국에서의 기억'의 한 조각이 되었을 테다. 우리의 이야기가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날 만난 수많은 외국인들 중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얼굴들이 있다. 먼저, 청록색 외투를 입고 있던 청각장애인이다. 다가가서 열심히 책자를 소개해드렸는데 그 어떤 대답도 없이 내 입만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멈칫하는 사이에 자신은 들을 수 없다며 귀를 가리킨 채로 고개를 내저으셨다. 혹시 내가 말을 건 게 부담스러우셨을까 봐 주눅 들어 쭈뼛거리고 있는 찰나에 내 손에 있던 책자를 집어서 가져가셨다. 그리고는 아주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봐주셨다. 이내 책자를 소중하다는 듯 손으로 몇 번 쓸어내리시더니 내게 흔들어 보이며 걸음을 옮기셨다.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을 받았다.  


두 번째는 독일에서 온 한 가족이다. 알고 보니 이들은 독일 출신 패럴림픽 선수의 가족들이었다. 오늘 자신의 딸을 보러 왔다며 자랑스레 깃발을 흔들어 보이셨다. 내게 딸의 얘기를 들려주는 동안 그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나는 거기서 엄청난 크기의 사랑을 읽었다.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달라도 부모의 얼굴은 늘 같다는 걸 깨달았다.


현장은 추웠지만 따뜻했다.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에 책자를 집어든 손이 연신 욱신거렸다. 한 외국인이 빨개진 내 손을 보고 자신의 장갑을 벗어주고 갔다. 꽤 많은 핫팩을 선물 받기도 했다. 참 신기했다. 국적도, 언어도 다른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서로의 평안을 빌고 다정과 친절을 베푸는 광경이.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모든 대화가 응원과 격려로 끝나는 그 훈훈한 순간이.


준비해 온 책자는 금방 동이 났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러시아어 책자 몇 권은 개막식을 보는 중에 뒷좌석에 앉아있던 러시아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94명이 함께한 8개월 간의 긴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텅 빈 가방과 꽉 찬 마음을 이고서 학교로 돌아갔다. 어찌나 강렬했는지 이따금씩 그날이 생각난다. 그해 우리가 만들어낸 건 단연 '책자'만이 아닐 테다. 나의 19살에 새겨진 그 수많은 이름과 얼굴들은 지금도 생생히 꿈틀거린다. 그러니 어쩌면 이건 나의 가장 소중한 기행문이다.


2018년 겨울, 평창에서 지구촌 축제를 즐기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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