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유학생과 함께한 이스탄불 여행기
이스탄불에서 1년 간 유학 생활을 하던 8년 지기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이 머무는 도시가 정말 아름다우니 파리로 넘어가기 전에 다녀가라는 내용이었다. 늘 궁금했던 나라였으므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방문하는 지역의 역사, 관광 명소, 효율적인 동선을 모두 조사하고 나서야 발을 뗐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친구 하나만을 믿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기꺼이, 그리고 친절히 자신이 사랑한 도시의 가이드가 돼주었고 자신의 집을 숙소로 내어주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맛있는 카흐발트 식당, 관광객은 잘 모른다는 야경 명소 등 도시의 구석구석을 소개해줬다. 시차 적응도 덜 한 상태에서 온종일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터키어가 전공인 친구는 전공 수업에서 배운 튀르키예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들려주곤 했다. 친구의 시선을 따라 도시를 보고 담다 보니 그곳에 금세 애정이 생겼다.
튀르키예 하면 떠오르는 한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한참 화제였던 웹예능 ‘터키즈 온 더 블록’을 떠올려보자. 해당 프로그램은 그동안 한국에서 주로 소비되던 튀르키예의 특정 이미지를 명확히 반영하고 있다. 유쾌한 돈두르마 가게 사장님, 우스꽝스러운 콧수염과 어딘가 변형된 전통 의상. 한국으로 따지면 관광객을 대상으로 일종의 쇼를 펼치는 엿장수가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튀르키예는 단순히 케밥과 돈두르마 정도로 기억될 나라가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오랜 기간 동서양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여러 문명의 주요 무대였다.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튀르키예 정부가 ‘터키즈 온 더 블록’을 고소해도 할 말이 없을 거라는 농담을 던졌다. 내 감각으로 직접 마주한 튀르키예는 역시 달랐다. 가장 놀라웠던 건 도시가 지닌 역동성과 사람들이 지닌 다정함이었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한참을 수군거리더니 “한국에서 왔나요? 저희 한국 정말 좋아해요! 하하, 좋은 여행 하시길”라는 말을 전하고는 부끄러워하며 사라졌다. K-Pop 덕분인지, 형제의 나라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한국인은 대체로 이곳에서 인기가 많다. 그 후로도 이방인으로서 받는 환영과 호의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귤하네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수줍게 인터뷰를 요청하던 학생들, 사진을 찍어달라는 내 부탁에 주변 관광객들을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쫓아내며 사진을 찍어주시던 아주머니, 박물관의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입구에서 망설이던 나를 발견하고는 친절히 전시관으로 데려다준 직원, 지하철 안에서 다 같이 축구팀 응원가를 떼창하던 사람들. 이스탄불 여행의 큰 기쁨은 대체로 이곳 사람들로부터 왔다.
성 소피아 성당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마그넷을 사러 기념품 숍에 들렀다. 형제처럼 보이는 두 명의 남자아이가 다가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객 행위로 느껴져 거리를 두려 했으나 자신들을 이 가게의 ‘big boss’와 ‘small boss’로 소개하는 모습이 귀여워 말을 붙였다.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는 아이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그해 23살이던 내가 13살인 줄 알았다는 아이들의 말에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13살처럼 보인다는 말은 기뻐하기에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아이들은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가격을 깎아주더니 거스름돈을 잔뜩 건네주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쭉 걷다가 고등어 케밥 혹은 홍합밥 냄새에 걸음을 멈추면 친구는 그런 나를 끌고 다시 선착장으로 향했다. 거의 5분에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었다. 처음엔 투덜거리던 친구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같이 멈춰 섰다. 함께하는 여행의 리듬이 생기는 순간이다. 강 건너 모스크를 찍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선박 끝에 서있는 나를 보며 “네가 만약에 여행을 하다가 사고가 난다면 그건 무조건 사진 찍다가일 듯”라며 애정 섞인 면박을 준다. 나는 친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카메라 세팅을 하다가 놓쳐버린 순간들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이국적인 풍경을 잔뜩 즐기고 저녁마다 케밥을 먹었다. 케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갈하고 다채로운 음식이었다. 숯불향이 가득 베인 질 좋은 닭고기를 향신료에 곁들여 먹으니 그동안 내가 먹었던 케밥은 다 무엇이었을까 싶었다. 튀르키예는 세계 3대 미식국가이다. 명성에 걸맞게 나는 이곳 음식을 정말 사랑했다. 거의 모든 음식이 입에 잘 맞았고 덕분에 매끼마다 행복해했다. 호불호가 심하다는 전통 요구르트 아이란까지 거뜬히 마시는 나를 보고는 나처럼 이곳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 애는 처음 봤다며 친구는 신기해했다.
그날 관광을 어느 정도 마치면 한적한 골목에 자리를 잡고 튀르키예 전통차 ‘차이’나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나는 다이어리를 꺼내 일기를 쓰고 친구는 아이패드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 당시 파리에서의 해외생활을 앞두고 있던 나는 오랜 시간 해외에 머문 친구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다. ‘차이’의 쌉쌀한 맛이 혀에서 사라질 때쯤 시리아 난민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물건을 사달라며 옆으로 다가왔다. 팔로 소매를 걷어 자신의 앙상한 몸을 드러낸다. 태어나서 한 번도 희망을 경험해 본 적 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친구는 익숙하다는 듯 아이에게 거절의 표시를 내보인다. 아이의 눈빛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왜 가장 반짝이고 투명해야 할 아이의 눈망울에서 체념과 절망이 읽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그 후에도 길에서 난민들을 여러 번 마주쳤다. 터키어를 모르는 나는 그들이 난민인지 튀르키예인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터키어를 공부하고 있는 친구는 단번에 알아채고는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실제로 길 위의 난민들의 범죄율이 상당히 높아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난민 문제를 무조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았던 나는 막상 난민들과 직접 마주하는 기회가 오자 생각이 많아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존에 지니고 있던 프레임과 경험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프레임이 자주 충돌한다. 한 발짝 떨어져 먼 나라의 이야기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감각들을 동원해 가며 얻는 이야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처럼 여행은 다른 문화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피곤할지라도 걸음을 내딛는 내내 열심히 주워 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스탄불에서의 3박 4일은 대체로 경이로웠다. 내가 이런 기쁨과 해방감을 또 언제 느껴보았는지 곰곰이 떠올려봐야 했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신 행복하다며 외치고 난리법석을 떨어도 내 말이, 나의 언어가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거라는 사실. 그러니 나는 더 깊이, 있는 힘껏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는 사실. 타국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은 어쩌면 언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흥얼거렸다. 그런 나와 8년을 함께 한 친구는 익숙하다는 듯 내 노랫소리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가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즈음에는 이제 귀에서 피가 나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친구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한국과는 미묘하게 다른 질감의 공기와 냄새가 입 안으로 가득 밀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