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자전거 타는 소년

우리는 언제나 도킹상태여야 한다. - 다르덴 형제-

by 아난다 박


예수는 말했다.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성경에서는 자신의 죄를 느낀 사람들이 돌 던지기를 주저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 시릴은 그 돌에 맞는다. 그리고 나무에서 추락한다. 돌을 던졌던 소년과 그의 아버지뿐 아니라 그 현장을 목격한 관객들도 덜컥 겁이 난다. ‘시릴이 죽으면 어떻게 하지?’ ‘과연 이 아이의 죽음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아이는 과연 죄가 있는 것일까?’ 다르덴 형제는 우리 모두를 시릴의 안부를 확인해야만 하는 조급함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겨우 눈을 뜬 아이는 다치고 의문스런 몸을 이끌고 위태롭게 한 손으로만 자전거를 다시 탄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린다. 이제 남은 우리는 그의 안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소년이 들고 가는 ‘숯’처럼 시커멓게 된다. 영화와 소년이 동시에 퇴장하고 온갖 착잡한 감정과 번뇌만 남은 이 공간은 전장의 포화가 지나간 자리 그 자체다.


이처럼 영화 ‘자전거 타는 소년’은 전쟁과 같다. 주인공 시릴은 자신을 보육원에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팔아버린 자신의 자전거를 필사적으로 찾아나선다. 다만 사만다라는 어른이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시릴이 버림받은 현실을 처음엔 부정하고 차차 직시하게 되는 그 절망의 과정은 날짐승의 몸부림과 눈빛으로 채워진다. 그 즉흥과 반동의 에너지는 어딘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의 것과 닮아있다.

시릴이 아버지를 찾아나설 때 마다 난관이 닥친다. 자신을 제어하려는 어른들이 힘과 말로 그를 막아선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자신을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는 아버지이다. 이 난관은 시릴에게 죽음과도 같다. 우리는 곧 소년이 생존의 곡예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사형선고와 같은 버림받음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하기 위해 살얼음을 걷는 아이의 현장은 총을 겨눈 채 적군의 진영에 들어서는 전쟁터와 같다. 따라서 핸드헬드 카메라에 담긴 주인공의 절박한 행동과 몸짓들에서 우리는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의 절규와 언제라도 자신의 뒷통수가 총알에 관통당할 수도 있는 병사의 눈빛을 그 누가 잠시라도 외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사만다의 의외성을 어느 순간 받아들이게 된다. 왜 그녀가 처음 본 아이의 자전거를 자진해서 찾아주고 기꺼이 그의 위탁모가 되어주며 그에 따른 고통을 감수했는지에 대해 영화가 애써 설명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대신 그녀의 선택은 전쟁 속 아이의 눈빛 앞에서 더이상 의외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녹아들어간다. 일상이 아닌 전장같은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소년을 지켜주고 구해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기본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의 정서적인 도킹상태에서만 살아나갈 수 있다. 그 존재가 가족이든 연인이든, 타인과 연결된 그 확장된 공간에서만이 생존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다. 시릴은 거의 유일한 대상이었던 아버지와의 연결이 끊기자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도킹상태를 이루기위해 몸부림쳤을 뿐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생한 탈선행위에 대한 정죄로 돌을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그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불완전하게 일어선 시릴이 어처구니없이 자전거를 타고 떠나 버렸을 때 우리는 그 질문들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지고 만다. 이렇게 다르덴 형제는 또 성공하였다. 관객들을 또 한번 전쟁과도 같은 현장에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의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