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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Mar 15. 2024

24. 3. 13.

3월 둘째주 생각들

그간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1, "아니 거기말고! 하 나 참 답답하네">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다. 출동벨이 울렸고 펌프차로 들어가 방화복을 갈아입었다. 화재 출동이었는데 주소가 정확하지 않았다. 업무용 핸드폰으로 신고자에게 전화하니 대뜸 짜증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아니! 몇 번 말하냐고. xx수원지 옆쪽 구도로라고. 소방관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못 찾아서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뚝. 이번 화재로 우리 센터, 본부, 인접 센터 두 군데, 구급차까지 총 5대의 차량이 출동했다. 119에 신고하면 신고자가 얘기하는 위치로 출동하는데, 이번 경우에 신고자가 얘기했던 곳은 'xx수원지 옆 구도로'였다. 간혹 어르신들이 예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지명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 동네에서 오래 거주한 분은 얘기하면 척척 알아듣겠지만 우리가 동네 토박이처럼 이해하긴 쉽지 않다. 보통 2년 단위로 센터를 옮기고, 진급을 하면 다른 소방서로 아예 일터를 옮긴다. 불은 논에서 볏짚을 태워 발생한 것이었고 발로 비벼 껐다. 시골엔 아직도 추수가 끝난 논에 볏짚이나 생활 쓰레기를 소각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 허탈한 날이었다.


<2-1, 타이어 공장 화재>
화재 출동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쓰레기 소각이나 논에 불을 내는 조그만 화재가 있는가 하면 큰 공장이나 시설물에 발생하는 대형 화재가 있다. 그리고 그런 대형 화재는 동일한 내용으로 신고가 들어오는 건수가 많다. 상황실에선 출동분대에 무전으로 "동일 신고건 xx건입니다."라는 식으로 전달해 주는 경우가 있는데, 동일 신고 건수가 많을수록 실제 화재가 발생했을 확률이 커진다. 출동 중인 차량에서 방화복을 입으며 무전을 들었다. "출동 중인 분대에 전파합니다. 현재 동일 신고 건수 18건입니다." 정말 화재가 났구나 실감하여 좀 더 호흡을 골랐다. 이번에 발생한 화재는 공장이었다. 공장은 화재에 최악이다. 높고 크다. 크다는 것은 가연물이 많다는 얘기며 높다는 것은 그만큼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공기가 충분히 그 공간에 가득 차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공장에 화재가 나면 큰불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사이렌을 울리고 바쁘게 미끄러져 가는 중 무전이 한 번 더 울린다. "출동분대에 전파합니다. 현재 검은 연기가 나는 상황이라고 하며 초기 대응에는 실패한 상태라고 합니다." 나는 열화상카메라와 제논 라이트를 카라비너에 결착시킨 뒤 숨을 천천히 쉬었다. 도착할 때쯤 앞을 보니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뭉게뭉게 올라가고 있었다.

<2-2, 타이어 공장 화재>
차에서 내려 호스를 꺼냈다. 방수장인 주임님께 관창을 건네고 뒤로 호스를 쭉 펼쳐 전개했다. 호스를 여유 있게 풀어놔야 나중에 진입할 때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호스를 정리해 놓고 주임님 뒤에 바짝 붙었다. 운전원에게 방수 개시 신호를 보내자, 호스에 빵빵하게 물이 가득 찼다. 관창을 열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 세찬 물줄기는 활활 타오르는 불로 뛰어들었다. 외벽에선 내부에서 발생한 복사열로 이글거리는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고 제일 중요한 화점은 내부에 있는 듯했다. 주임님은 점점 안으로 발을 옮겼고 나도 뒤로 바짝 붙어 따라갔다. "펑!"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내부에서 타이어가 터지는 듯했다. 순간 머리를 들어 거대한 공장을 살폈다. 열변형으로 외벽이 다소 휘어져 있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면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샌드위치 패널 구조면 연소 확대가 되기 쉬운 데다가 붕괴위험도 있다. 정신없이 주수하는 주임님 뒤로 바짝 붙으며 난 수시로 머리를 들어 외벽을 확인했다. 혹시 무엇이 떨어지진 않을까. 최대한 근접하여 화점 부근에 주수하여 화세를 어느 정도 꺾은 뒤엔 건물 외벽에 방어주수를 했다. 벽에 물을 끼얹으며 더 이상 온도가 높아지지 않도록 하여 추가 연소 확대 우려를 낮추려는 방어 전략이었다. 거칠게 타들어 가던 불은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몸을 낮추고 연기만 풀풀 내보냈다. 공장 측에서 제공한 이온 음료를 마신 뒤 잔불 정리를 했다. 화재 출동 뒤엔 팀원들과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팀을 넘어서 식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3, "불이 났어요, 내 맘 속에 불이">
보통 화재 출동을 가면 우리 시에선 펌프차 한 대, 구급차 한 대, 그리고 지휘차 한 대를 기본으로 출동시킨다. 관내 지역이 애매할 경우 인접 센터 펌프차를 추가로 보내거나, 고층 건물이 있는 경우 고가사다리차를, 화재 규모나 성상이 일반적인 경우와 다를 때는 화학차나 조연차를 추가로 출동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화재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3대가 배정되는데 이 경우는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경우다. 어느날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우리 센터 펌프차와 구급차, 다른 센터의 펌프차 두 대, 그리고 지휘 차량까지 총 다섯 대의 소방 차량이 출동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고자가 불이 났다고만 얘기하지, 화재가 어디에 발생했는지 얘기를 하지 않고 동일 내용의 신고도 없다고 얘기했다. 우선 달리는 펌프차 안에서 방화복을 바쁘게 갈아입었다. 그러던 와중 먼저 도착한 선착 분대의 무전이 들렸다. "여기 xx 분대, 현재 현장 도착해본바 특이 사항 없습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울리는 무전. "신고자 만나서 확인해 본바 주취자입니다. 특이 사항 없으므로 타분대 철수하셔도 되겠습니다." 요즘도 이런 경우가 있구나. 언젠가 내 맘속에 불이 났다고 119에 장난 전화를 했다던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얘기를 전해 들은 적 있는데 이 경우가 그것과 다를 게 있나. 허탈한 마음으로 복귀하고 방화복을 벗어 정리했다.


<4, 두 번째 고향, 진해>
진해는 내게 각별한 장소다. 백수였던 나를 사회구성원으로 만들어 준 곳이기도 하고 이곳에 살며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진해에 있으면 우선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져서 기꺼이 다른 무엇을 하고 싶은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확히 '집'이라는 표현에 부합하는 곳, 가장 평온한 곳, 사랑하지 않는 구석이 없는 동네다. 그런 진해를 올해 떠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빠르면 상반기에 짐을 쌀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사실이 조금 슬프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진해가 부산만큼 좋다. 진해의 건물은 낮고, 조용하다. 곳곳에 숨은 명소가 많다. 쉬는 날 소죽도 찜질방에 가서 땀을 쭉 뺀 뒤 먹는 라면, 자전거를 타고 진해루를 가로질러 오에프오에프에 멈춰서서 마시는 커피, 열 시가 넘어 출출한 밤을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겐쇼심야라멘의 바질라면, 추천해 주시는 것마다 맛없는 게 없는 더글라스 와인, 회가 무려 만원부터 시작하는 박리다매의 대명사 동부 회센터까지. 부산에선 그곳에 함께 자란 내 친구들을 좋아했던 거라면 진해는 오롯이 이 공간을 사랑한다. 여기선 내가 내 이야기를 쓸 수 있다. 내가 동네를 걸으며 만날 수 있는 추억이 열려있다. 기꺼이 낯선 식당을 가보고 싶고, 그런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그런 마법 같은 동네다. 계절마다 이름 모를 담벼락의 꽃들이 분홍색, 하얀색, 노란색으로 계절을 알리는 동네, 개가 멍멍 짖고 고양이가 우는 동네, 건물이 낮아 하늘이 한 움큼 더 가까운 동네, 이곳을 떠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고 아꼈던 만큼 많이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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