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부끄러워하는 AI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동미술.
실수를 부끄러워하는 AI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동미술.
Chat GPT가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 질문에 답하고 주제에 맞춰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기술 발달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위협받을 직종을 예측하는 기사도 어렵지 않게 마주합니다.
AI가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저희 예술가 부부는 ‘예술만큼은 AI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미 예전에 정리된 화풍을 분석 종합한 후 명령 값에 맞춰 구성했을 뿐, 대단히 새로운 면모는 없었습니다. 높은 기술적 부분까지 스트레스 없이 짧은 시간에 수행해 내는 능력에 감탄했을 뿐이죠. 그런 기술적 부분은 예술에서도 분명히 사용될 것입니다. 마치 사진 기술처럼 말이죠. 사진기가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회화는 역사 속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혹은 ‘기계로 찍어내는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없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노출과 렌즈의 변화 등으로 찰나의 예술을 담아내는 노고에서부터 포토샵이라는 디지털 기술의 결합까지, 사진은 예술사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했고, 회화의 사실적 묘사는 사진 기술을 넘어서며 건재했습니다. 쉽게 완성시키는 줄만 알았던 기술의 발전은, 여전히 작가의 뼈를 깎는 창작의 고민으로 시작하여 수작업 못지않은 노동력이 덧붙어서야 완성이 되었습니다. AI 예술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파스텔이나 유화나 포토샵처럼 하나의 도구로서, 혹은 콜라주의 일부로서 말이죠.
결국엔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라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담아내는 표현의 방법적 문제는 ‘무엇'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인공지능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해당하는 창의적 사고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의력이란 신체 오감과 정서적 오감의 경험 축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고요.
먼저 창의성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이는 어떠한 대상이나 문제를 하나의 시각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에 다양한 방면으로 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철학적 사유와도 닿아 있습니다.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이제껏 보고 경험했던 것들을 조합하여 엉뚱한 상상을 펼치는 것이죠. 우리에게 익숙한 무엇들을 연결하고 조합하여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에 높은 창의성을 지닌 사람은 ‘그저 무엇인가를 연결했을 뿐'이라고 답하곤 합니다.
미술학도 시절, 창작의 고민에 빠져 헤매는 저의 모습을 본 철학과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예술가란 매일 마주쳐 익숙해진 나무 한 그루를 그리되, 누구도 보지 못했던 나무의 특별함을 찾아내어 작품에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 그림을 본 관객은 다시금 길가의 나무를 바라보며 익숙했던 존재로부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낯섦을, 하찮음으로부터 특별함을 끌어내는 사람이 예술가다.”
고전적인 예술의 역할이자 현재도 부정할 수 없는 예술의 역할이죠.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개념정의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어느 날, 웹툰 작가가 장래 희망이라는 초등학생이 “아이패드에 그림 연습을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희 선생들의 견해는 단호하게 ‘반대'입니다. 작품의 결과물을 빚어내는 도구로서 디지털은 찬성이나, 정서적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으로서는 아날로그여야 합니다. 종이 위에서 서걱거리는 연필의 느낌, 부드러움과 거침을 동시에 지닌 목탄의 부서지는 가루, 재료를 다루는 나의 모든 관절에까지 진득함이 발리는 듯한 오일파스텔, 그 모든 재료가 종이의 두께와 종류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나무 위에서 캔버스 위에서 또 다릅니다.
오감을 통한 정서적 경험은 사용하는 재료뿐 아니라 보고 느끼는 대상 또한 그러합니다.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는 잠자리와 설경이 아니라,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더위에 친구와 풀밭을 내달리며 웃음을 흘릴 때 주위를 맴도는 잠자리에 대한 호기심이며, 두꺼운 옷과 장갑을 착용하고도 양 볼에 스며드는 추위에 얼굴을 감싸며 뽀드득 밟히는 함박눈의 감격을 가족과 친구와 나누는 정서적 경험입니다.
예술창작은 재료의 특성과 기술적 표현력을 주제에 맞춰 배치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예술적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이제껏 보아왔던 그림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하고, 이제껏 그려왔던 나의 그림과는 달라야 합니다. 과거의 ‘성공으로 인정받은' 것들을 종합 분석한 것만으로는 절대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패한 것으로부터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각으로 그들을 느끼고, 마음이란 정서적 공간에 그들을 쌓아 두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상으로 ‘무엇’을 어렴풋이 그려낼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디지털로 대상을 경험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 오감을 통한 정서적 경험을 축적할 수 없고, 자신의 창의력을 최대로 끌어 올리는 데엔 장애물로 작용할 것입니다.
디지털 미디어 업체에 종사하는 가정일수록 자녀를 기술로부터 떼어 놓으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업체가 포진해 있는 실리콘밸리의 경영진 자녀는 고등학교 이전에는 스마트폰과 태블릿뿐 아니라 컴퓨터와 프로젝터까지 사용하지 않는 교실에서 종이책과 칠판으로 공부하고, 자연 속에서 흙장난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기계적 계산은 계산하는 기계(계산기)가 더 잘하듯, 기계적 학습을 바탕으로 한 능력 또한 Machine Learning을 탑재한 인공지능이 더 뛰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공감 능력을 기반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과 창의적 사고로 새로움을 빚어내는 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공감 능력이란 것이 마주한 사람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니 디지털 매체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공감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하고,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되고 모든 모방의 원본은 자연이며 가장 많은 색상을 보유한 것도 자연이라는 진실을 기억한다면, 실리콘밸리 경영진이 선택한 자녀의 교육방식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인공지능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소통과 공감 능력은 마주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것이고, 아이의 창의력을 최대치로 올려주는 교육은 디지털 매체를 멀리하고 자연을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죠.
인공지능을 포함한 디지털 기술을 전면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 생활의 일부로 깊숙이 스며든 만큼 예술창작의 도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의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키우는 성장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에요. AI시대를 맞아 우리 아이의 미래가 살짝 걱정되셨다면, 당장 아이와 함께 야외로 나가서, 거창한 자연이 아닐지라도, 풀 한 포기를 찾아 들여다보고 만져보며 드로잉 한 점 끼적이는 것은 어떠하실지요?
2022년 6월 김사랑 (초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