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역의 기독교(개신교)의 역사 #1

[기독교역사][개신교뒤집어보기]

by 니코데무스

(명칭은 6.25전쟁, 그리고 정확한 국가명칭 대신 편의상 남한/북한으로 표기 합니다.)


1989년 11월 9일, 동-서 베를린을 막고있던 장벽이 무너지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방송되었습니다. 이어 이듬해 10월 3일, 두 개의 '독일'은 하나로 통일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 전 세계 그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바로 한반도에서 분단국가로 살고 있던 '한민족' 구성원 모두였을 것입니다.


분단 국가였던 독일이 통일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에서 독일 교회 관계자의 강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우연치않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의 대부분은 '독일의 통일'이라는 놀라운 결실이 있기까지 동독과 서독의 교회가 얼마나 긴밀히 협조하였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들이었습니다. 자세한 것들은 이제 기억에서 흐려졌지만, 요지는 외교관계(국가 대 국가)에서는 다룰 수 없는 민간 차원의 협력의 중요성이었고, 이야기를 전해주던 발표자의 약간은 상기된 느낌 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인공지능에게 '통일의 과정 속에서의 동독과 서독교회의 역할'에 대해 물어봤더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을 주더군요.

1. 공동 신앙과 문화의 연속성

2. 자매교회 및 교류 활동

3. 물질적·재정적 지원

4. 평화운동과 민주주의 훈련의 장

5. 종교대회와 연합운동


물론 독일의 분단 상황은, 특히나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장기적으로 통일(또는 1국 2체제 혹은 지금의 휴전이 아닌 전쟁이 끝나고 교류가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상태)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북한과 관련되어 우리(남한)쪽의 수고비용은 얼마나 될까요? (관계 개선이기에 국방 관련 비용은 제외하고) 탈북자 관련 사업만 보더라도 정부 예산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차원의 사업 비용 역시 적지 않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현재 '탈북민 3만명 시대'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통일부에 따르면(2022년) 454개의 민간단체가 북한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법보신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 550여개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종교계 탈북민 지원단체는 총 163개며 대북 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를 제외하면 개신교가 48개로 탈북민 지원사업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출처 : 법보신문)

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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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숫자만으로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사업 내용 중, '선교(전도)'를 위한 것들도 적지않겠지만, 개신교 쪽이 여타 종교단체보다 더 활발하게 지원하고 있는 것 만은 사실입니다. 북한 관련 사업에 개신교의 역할이 이렇게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백여년 간의 시간 속에 한민족이 겪었던 수 많은 일 들 속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라면 단연코 일제강점기, 6.25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분단의 상황일 것입니다. 스펙트럼을 '한국의 개신교회'로 좁혀 본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고통의 결과는 어쩌면 현재 한국 개신교의 여러가지 상황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포함하여) 상당 부분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미래의 '통일 한국' 속에서의 개신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그러기에 앞서 과연 북한 지역의 '개신교회'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돌아보려 합니다.


우선 '북한 지역의 기독교(개신교)의 역사'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개신교(이하 기독교)가 한반도에 유래되는 과정으로 부터,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분단의 시대 속에서의 교회의 활동에 대한 내용들을 참고도서* 에서 요약해 보았습니다.


참고도서*

한국 기독교의 역사 I, II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 기독교문사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 옥성득 / 새물결플러스


북한 지역 기독교의 역사

[목차]

1.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서양 종교의 전래

1-1 서학(카톨릭), 서북지방, 계급사회의 타파

1-2 토마스의 순교

1-3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번역, 권서

2. 동양의 예수살렘, 대각성운동(원산, 평양)

3. 해방과 한국전쟁

(여기까지가 지금부터 약 70여년 이전의 과거의 역사이고, 이후는 4.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4. 변화하는 북한교회(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교회의 생존/생성/정착)

5.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남북한 교회의 새로운 연합 가능성)

6. 21세기를 향하여




1.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서양 종교의 전래


1-1 서학(카톨릭), 서북지방, 계급사회의 타파


천주교(카톨릭)가 이 땅에 전래된 것은 18세기 후반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올 즈음, 조선 왕조의 국운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서구 문물에 대한 거부감 역시 점차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카톨릭'이라는 낯선 세상의 종교는 공식적인 선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조차 '서학'이라는 임시 이름으로 불리우며 당시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명례방사건(1785년)을 시작으로,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으며 이후 100여년에 걸친 수 많은 박해사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자/피해자들이였죠.)


한편, 이 시기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홍경래의 난(1811~1812)'입니다. 오랜 세월 차별을 받아온 서북지역의 농민들이 주도한 '반봉건적 민란'이라는 평가의 이면에는 여러가지 사회-경제적 원인들이 겹쳐져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청나라와의 무역 증가로 인해 대상인으로 성장하는 계층 및 광산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소농민 계층은 점점 몰락해 가는 신분계층에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17세기에 있었던 경신대기근에 필적할만한 1809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다수의 농민이 생업을 버리고 유민이 되거나 광산 노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중 서북지역 농민들의 피해가 가장 심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편,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과거 시험에 낙방하며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과 외척 세도정치 하의 여러 모순에 불만을 품고 과거를 단념한 채 병서의 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몰락양반, 유랑지식인들과 어울리면서 10여 년간 조직적으로 봉기를 준비하였는데, 역참의 노비 출신으로 부를 축적한 이희저가 자금을 대었으며 비슷한 처지의 부유한 상인계층으로 부터 재원을 충당하였습니다. 결국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사백여년간 지속되어 오던 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국가 체제인 '계급사회'의 근간이 점차 흔들리면서 새로운 신분질서가 이야기 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서북지역을 통하여 이 땅에 서양의 종교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승훈에 의해 전래된 천주교도 서북지역을 통과해 서울(한양)에 이르기는 했지만, 개신교의 경우 서북지역과의 인연의 끈이 더욱 굵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2 토마스의 순교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년 ~ 1866년 9월 5일)는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선교사다. 한국 이름은 최난헌(崔蘭軒)이다. 영국 웨일즈 출신이며 선교차 내한하였으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엮여서 순교하고 말았다. 기독교 출신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토마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1866년 9월 5일, 평양 군민들에 의해 대동강에서 침몰한 중무장 상선 '제네럴 셔먼호'는, 우리와 미국 간의 최초의 전투였던 신미양요(1871)의 원인이 되었다고 배워 왔습니다. 당시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은 군함에 준하는 전투력을 가진 상선으로 세계 각지의 바다를 누비며 아직 서구화? 되지 못한 많은 미개한 나라를 상대로 통상을 요구하며 새로운 시장 개척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토마스의 순교'를 한국(당시는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를 향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선교라고 애써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그가 탑승했던 배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자들의 첨병이었던 셈이죠. 미국이 군함을 앞세워 일본을 위협하며 '미일화친조약'(1854)을 맺었던 것이 불과 12년 전 입니다. 일본과는 사뭇 다르게 배 한 척만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고는 해도, 이미 그들은 일본에서의 성공의 경험을 그 이웃나라에도 시도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또한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던 1866년은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병인박해와 그로 인해 프랑스와 충돌하게 된 병인양요가 있던 해였습니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서양의 무장상선에 대한 평양의 군민들의 분노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당시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인 돛단배를 타고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입국 하던 것이 관례였기에, 제대로 된 큰 배를 탈 기회가 생기자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제네럴 셔먼호에 무리하게 탑승했던 그의 섣부른 판단이 아쉽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1910년도 까지 그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한 어떠한 글도 발견되지 않았고, 또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본격적으로 서양선교사들에 의한 선교가 시작된 1885년 이후, 한국 선교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사무엘 마페트(마포삼열) 선교사가 처음 평양에서 전도를 시작했던 1890년에 주민들로 부터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사람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며 꺼려했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 땅에 믿음을 싹 틔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하는 사건인 '토마스의 순교' 역시 서북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1-3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번역, 권서


토마스의 순교가 있을 즈음,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만주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 선교사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할 정도로 공부하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의 평양에서 있었던 토마스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인 '고려문'이라는 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곳에서 만난 한국상인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들은 청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자립적 중산층'으로 대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하여 독서가 가능하며,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했다고 합니다.


1876년 3월 강화도조약으로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자, 로스 선교사는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여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나고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또한 1879년에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은 1881년 인쇄에 들어간 '누가복음' 이었으며, 1887년에는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가 출간 되었습니다. 이후의 국내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성서위원회가 조직되고 본격적인 한글성경 번역이 시작되었습니다.

image.png (출처 : 대한성서공회)


권서인의 모습(출처 : 한국컴퓨터선교회)


초기에 번역, 출간된 성경은 개종자들 및 '권서인' 혹은 '매서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성경을 짊어지고 마을마다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뿌린 전도의 선구자들로 이들의 노력 결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인 1880년대 초 만주와 국내에 여러 신앙공동체들이 조직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생겨난 신앙공동체는 1884년 말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 천 가정들'이 생겨날 정도였는데, 신앙생활을 반란음모로 오해한 중국인 지주의 방해로 인해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는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상당수는 한반도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터전을 잡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1890년 마페트 선교사의 평양 선교가 시작되던 시기에 '서양 오랑캐'에 적대적이던 군중들 속에 어쩌면 이미 기독교신앙을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사람들이 마페트 선교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2. 동양의 예수살렘-평양, 대각성운동(원산, 평양)


잠시 언급했던 사무엘 마페트 선교사는 한국에서 46년간 선교사 생활을 하며 이 땅의 복음화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특히 평양에서의 활동에 힘 썼는데, 1899년 평양에 첫 교회(장대현교회)를 세웠고, 22명의 전도사들에게 성서를 가르친 것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1901)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1894년 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교회와 신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이후 평양대부흥운동(1907) 등으로 이 땅에 신앙의 불꽃이 타오름을 느끼게 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1920년대에 이르러 평양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성공을 기뻐하며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일부 정치인 혹은 목회자들이 특정 지역(도시)에 대해 '성시화(聖市化)'하겠노라 하는 발언의 시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소수의 신앙인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기에 반가워할 수 많은 없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평양에서의 기독교 발전의 역사는 이 땅에 전래된 기독교 역사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사건 이기에 백년이 지난 지금 시대의 우리들도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또한 원산과 평양에서 있었던 대각성운동은 외래종교인 기독교,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일방적인 선교 앞에서 피동적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한국 신자들이 진정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 자리이자, 선교자-피선교자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의 믿음의 공동체로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귀한 두 번의 체험이 서북지역을 포함한 북한 지역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지역이라는 의미와 무관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런지 당시 한반도 전역의 기독교 교세는 북한 지역이 남쪽 보다 더 활발했고 이런 상황은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의 자료를 보아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서북지역은 이 땅 이 민족의 기독교 신앙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현재 남한지역 기독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단 종파인 통일교(기독교통일신령협회, 문선명)와 전도관(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 박태선) 역시 그 뿌리를 찾아가보면 스승이라할 수 있는 인물이 김백문인데, 그가 영향을 받았던 것이 바로 평북 철산에 설립되었던 성주교회(김성도, 백남주)였습니다. 해방 전 문선명은 김백문의 제자가 되었다가 이후 평양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54년 통일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박태선 등도 해방 후 대중적인 부흥집회를 이끌며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한국 이단 종요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남한 지역의 이단 종교의 뿌리 역시 북한 지역인 것이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이 땅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었던 수 많은 혼란과 고통의 시간들 역시 남/북 지역에 따라 여러 특징이 더 있겠지만 내용이 너무 방대해지기에 따로 정리하지는 않았습니다.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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