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역의 기독교(개신교)의 역사 #2

[기독교역사][개신교뒤집어보기]

by 니코데무스

(먼저 쓴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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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역 기독교의 역사

[목차]

1.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서양 종교의 전래

2. 동양의 예수살렘, 대각성운동(원산, 평양)


3. 해방과 한국전쟁(1945~1950년대)

3-1 해방 직후

3-2 6.25전쟁 기간

3-3 전쟁 전후의 종교상황

4. 변화하는 북한교회(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교회의 생존/생성/정착)

4-1 사회주의 속의 생존 모색(1950~60년대)

4-2 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1970년대)

4-3 사회주의적 교회의 정착(1980년대~)


5.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남북한 교회의 새로운 연합 가능성)

6. 21세기를 향하여



3. 해방과 한국전쟁(1945~1950년대)


3-1 해방 직후


(1) 사회주의 정권 성립과 교회의 반응


해방 직후,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자 북한교회는 앞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단체를 결성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기독교사회민주당(윤하영, 이유필, 한경직 목사 등)이나, 조선민주당(당수 : 조만식) 등이 그것입니다. 1948년 북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조선민주당 대표 35명이 선출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자 공산주의자들도 기독교계와 통일전선을 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양측의 갈등과 대립이 커지자, 반대파의 수장 조만식을 위원장에서 몰아내고 연금했다가 친일파로 숙청하는 등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됩니다. 결국 많은 교인들이 종교적, 정치-경제적 이유로 인해 월남하게 됨으로써, 해방 직후 약 30~35만 명에 이르던 북한 지역의 개신교인은, 1949년에는 약 20만명으로 크게 감소하게 됩니다.


(2) 북조선기독교도련맹(조기련)의 탄생


북한에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추진하던 세력과 교회가 집단적으로 크게 충돌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1946년 11월 3일에 실시된 인민위원회 선거일로 일요일이었습니다. 상당수의 기독교 세력이 결의문의 내는 등 집단적인 반발을 하자,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이 크게 당황하여 회유와 설득을, 그리고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은 비판을 하며 결국은 밀어붙여 선거를 치룹니다. 이후 친정부적인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김일성의 외종조부인 강량욱에게 '애국주의 교양'의 실시와 새로운 기독교 조직의 결성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46년 11월 28일 평양에서 '북조선기독교련맹(조기련)'이 조직됩니다. 이로 인해, 교회 내부는 친사회주의적인 교회와 사회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교회로 양분되게 됩니다.


북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인들은 조기련에 가입할 수 밖에 없었고, 1947년 여름까지 북한 개신교인의 3분의 1 정도가 조기련에 가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때 부흥사로 활약했던 김익두가 1949년 조기련의 초대 총회장이 되었으며, 1950년 3월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통합하여 평양기독교신학교로 개칭하였는데, 6.25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더 이상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3-2 6.25전쟁 기간


자신의 영토에서 전쟁을 치룬 국가 치고 피해가 적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6.25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면서 갑자기 맞이하게 된 해방의 시간도 잠시, 과거를 청산하면서 독립된 국가를 세울 준비를 해야하는 기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채,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이 시작됨으로 인해 남북한 동포들 사이에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적개심과 증오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전쟁 기간 전후로도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죠. 그런 가운데 남한의 교회들은 전쟁통에 가족이나 사회로 부터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로를 줌으로써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은 크게 네단계로 전개되었습니다.

1. 개전 초기 : 유엔군 참전으로 국제전이 됨

2. 유엔군의 압록강 진군 : 남북한 교회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음. 살해와 납북 이어짐

3. 중공군 개입 : 북한 지역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

4. 휴점 협정 체결 : 남한교회는 이승만 정부와 함께 휴전을 강력하게 반대


해방 직후부터 남북한의 교회는 여러 이유에 의해 활발하게 정치참여를 이어왔으며, 전쟁이 일어난 후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한의 교회]


유엔군의 북진으로 평양을 탈환했을 때 북한 기독교인에게 유엔군은 '8.15해방 다음 가는 감격을 맛보게 해준' 구원자 처럼 환영 받았습니다. 이후 유엔군 점령기간 동안 반공 행위를 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유엔군을 따라 남쪽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부산 피난시절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미국교회에 한국 정황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한경직과 류형기 목사를 미국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남한의 교회들은 휴전 반대 운동을 최고의 구국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는 휴전이 통일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과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1953년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교회위원회의 총무 놀드가 이를 교회 및 정계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설득하기 위해 내한 하였는데, 이승만을 포함한 한국 지도자들은 모두 휴전 보다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북한의 교회]


남한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교회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북한정부의 전쟁 수행을 도우며 전승을 기원했습니다. 전쟁 승리를 위하여 각종 궐기대회와 무기 대금 헌납운동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연맹(조기련)의 초대 총회장을 지낸 김익두 목사가 10만원을 헌납한 후 북한지역 전역으로 확신되어 갔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조기련의 대표들이 서울에 와서 좌파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연계하기도 하였지만, 거꾸로 유엔군의 서울 수복과 압록강까지 진격해 갔을 때는, 많은 북한지역 교인들이 유엔군과 국군을 환영했고, 반공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유엔군이 후퇴할 때 미처 월남하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은 이후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북한에 남은 교인들은 전쟁 후 초대교회와 같이 교인의 집을 예배처소로 정하여 비공개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북한에서의 가정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3-3 전쟁 전후의 종교상황


6.25전쟁 후의 남한의 교회는 오래된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혼란스럽고 낯선 문제들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신사참배와 관련된 해묵은 갈등과 불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1930년대 고조되었던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 간의 신학적 대립 등으로 인해 교회는 분열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다른 쪽에서는 기도원을 중심으로 은사 집회가 확산되어 가면서 영향력을 가진 이단적 단체가 발생하여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대표적으로 통일교와 전도관이 이 시기에 탄생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남한과 북한 두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남한의 경우 친기독교적인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교회와 정부의 유착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남한의 경우 기독교화된 국가제도가 도입된 사례로 '군종제도'가 있습니다. 군종사업을 한국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획기적인 사실'로 평가한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이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군인 가운데 기독교 신자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집권 이래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북한의 교회는 남한과는 달리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됩니다. 시기적으로는 8.15해방으로부터 김정일 시대(~2011)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이고, 점진적이지만 일정한 변화의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크게 나누어보면,

종교 제한정책(1945~49)

종교 말살정책(1950~71)

제한적 이용정책(1972~85)

제도적 허용정책(1986~)*

등과 같이 네 단계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참고한 서적의 출판된 시기가 2009년으로, '김정일 시대'까지 다루어졌습니다.)



4. 변화하는 북한교회(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교회의 생존/생성/정착)


4-1 사회주의 속의 생존 모색(1950~60년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개신교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민족 의식의 고취와 사회 개혁 등 직-간접적인 독립 운동에 앞장 섰음에도, 한편으로는 강압과 회유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부일 행각을 벌임으로써, 해방 후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교회 내 '친일 청산'이 잠재적인 과제로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6.25전쟁을 겪으며 남-북의 교회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남한의 교회는 과거 청산 문제를 포함하여 신학노선의 차이와 교권 다툼 등으로 갈등이 폭발하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친 기독교적인 이승만 정부의 힘을 입어 남한 사회의 재건에 리더 격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북한의 교회들은 남한의 교회들 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쟁 기간동안 종교시설이 철저히 파괴 되었음은 물론, 전쟁 피해 복구에 전인민이 총동원 되고 나라 전체가 사회주의 국가로 재편되는 가운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종교허무주의'나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인 미국의 종교'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신자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밝히기 어렵게 되면서 과거와 같은 신앙생활은 점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1958년에 이르자 피해 복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기독교를 포함한 여타 종교인들 역시 이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959년은 북한 정부가 발행한 반종교 책자들이 정점을 이룬 시기였으며,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태도를 결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으려 했던 이들은 작은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머지 않아 그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감리교 목사 홍기주와 장로교 목사 강량욱(김일성의 외종조부)를 포함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남북연석회의에 기독교민주동맹 대표로 참석했다가 남한의 단독 선거 및 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북한을 선택한 감리교 목사 김창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 등이 있었으며, 감리교 목사 이풍운의 경우 6.25전쟁 후 교인들과 함께 있기 위해 월남을 거부하고 함께 협동농장을 만들어 지도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전쟁 후 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를 '종교 말살정책'의 시기라 부릅니다. 1960년대 사회주의의 '황금기'를 지나면서 종교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북한 당국의 자신감의 표현으로, 조선로동당 정치국은 안신호와 강선녀(김일성의 외척) 등 저명 인사와 당의 간부급 인사 부모들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허락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켜왔던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의 적대적인 계급으로 분류되어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오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 서로 연결되며 가정예배로 조직될 수 있었습니다.


4-2 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1970년대)


1972년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남한에서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졌고, 북한은 그 해 12월 새로운 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자인 김일성 '주석'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함으로서 인간중심론적 주체사상이 형성되었고, 종교 역시 필요에 따라 통일전선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 북한은 남북대화가 본격화 되고, 서구 세계와의 경제교류를 통하여 변화하는 국제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힘 쓰던 시기가 되자, 외부적으로는 국제적 기독교 단체에 참가하거나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중앙 종교 조직의 활동을 재개시킵니다. 평양신학원이 1972년에 개원하였고,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남한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면서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이하 조기련)라는 조직이 등장합니다. 평양신학원은 한 기당 입학생 수가 10여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체제 내에서 기독교가 유지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계기가 되었으며, 조기련은 세계교회협의회나 기독교평화회의 등 국제적 기독교 단체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당시 북한의 종교 정책은 일관적이지 않았지만, 향후 종교를 통한 대남투쟁을 염두에 둔 조치라 이해됩니다.


해외의 기독교 단체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자 외국에 거주하는 진보적인 한국계 기독교인들이 북한 기독교와의 교류를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4-3 사회주의적 교회의 정착(1980년대~)


해외의 기독교 단체들과의 교류와 국제 환경의 변화로 인해 북한 정부는 서서히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며 종교관 역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종교정책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남한기독교인들과 회의와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주체사상가들은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3년 찬송가와 신약성경이, 1984년에 구약성경이 출판되었는데 남한의 '공동번역'을 참고하여 조선문화어 표기법에 따라 개역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북한에는 20여명의 목사와 1만여 명의 기독교인, 그리고 약 52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1만여 명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조기련에 가입하여 공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수가 약 6천명 정도 되었지만 아직도 정부의 간섭 없이 개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만여명이라는 숫자는 2000년대 들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아 더 이상 새로운 교인이 추가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시기 북한 사회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그간 종교탄압을 위한 '독소조항'으로 알려져 왔던 '반종교적인 선전의 자유'가 1992년 개정된 북한 헌법에서 삭제된 점인데, 반종교 선전 역시 축소되는 대신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종교가 체계화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1988~89년에는 북한 기독교 역사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1988년 10월과 11월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각각 문을 열었는데, 봉수교회는 그동안 북한과 접촉한 한국과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교회건립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도 15만 달러를 지원한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중 3만달러는 남한교회가 비밀리에 헌금하였다죠) 우리는 그동안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에 매우 민감할 수 밖에 없었지만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사회에 종교시설이 공식적으로 세워짐으로 인해 그들은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할지 몰라도 외부 세계와의 창구 역활과 내부적으로도 북한 지역 기독교 신앙의 맥을 이어갈 의미있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북한 당국과 인민들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문익환 목사, (천주교 신자)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었습니다. 남한의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1989년 3월과 6월에 각각 방북한 이들이 북한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더구나 기독교인인 이들이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에 가서 발언하거나 예배드리는 장면이 북한의 텔리비젼을 통해 방영됨으로 인해 북한 내부적으로도 크게 홍보가 되었고, 개신교에 비해 활동이 미미했던 북한 천주교를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남한의 종교인들의 민주화나 통일 운동이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었지만, 남한의 개신교 목사가 김일성과 만나고 통일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장면도 그렇고,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가깝게 목격한 남한의 젊은 학생 임수경이 보여준 종교적인 행동은 성직자인 문익환과 문규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남한의 기독교인 가운데 고난을 무릅쓰고 통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간 북한에서 교육시켰던 기독교에 대한 평가와 상충되기도 했죠. 앞에서 설명했듯 1992년의 헌법 개정을 포함하여, 1988년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설립되고 이듬해 부터 기독교 전공이 설립되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표면적인 변화가 곧바로 북한 사회의 개방으로 연결된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박승덕은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공존 가능성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파하였던 사람으로,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기독교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며 인간구원과 인간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로마에서 처음 국교화된 기독교가 착취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고 피착취계급의 자주성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이천여년간) 해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자세와 사명에 맞게 점차 민중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현세천국, 현실참여, 사회구원 등에 대한 현대 신학의 관심을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전통적 유물론의 한계를 비판한 후, 사회적 집단의 생명은 무한하다는 주체사상의 집단주의적 영생관이 기독교의 영생을 포괄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박승덕, “기독교에 대하는 주체사상의 새로운 관점”, PS.2 참조)


한편 북한 기독교가 해외의 기독교 단체들과 교류하기 시작함에 자극을 받은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는 남북 통일문제를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제안하였고, 마침내 1984년 가을 고텐바에 있는 일본YMCA의 도잔소(東山莊)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개최한 도잔소협의회가 열리게 되는데 우리나라 통일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회의의 원 제목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평화와 정의-분쟁의 평화적 해결' 이었는데, 북에서는 대표단 참석이 어려워 회의를 축하하고 성공을 비는 전문만 보냈으며, 남한 교회에서도 당시 '통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어 주체측과 협의하여 제목과 발표문 등을 수정하였다고 합니다. 남북교회가 함께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이 때를 계기로 2년 뒤인 1986년 스위스 몽트뢰 근교에서 개최된 글리온 대회에서, 남북한 교회 대표들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후, 몇번의 국제대회에서 만남이 계속 되다가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여 봉수교회의 부활절예배에 참석하는 계기가 됩니다.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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