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적 제주행 그리고 워케이션

백수의 제주도 워케이션 코스프레와 자기 성찰 일지 - 01

by 민근

백수가 즉흥적으로 제주에 내려와 어디 나도 한번 워케이션? 은 무슨 워케이션 코스프레하다가 자기 성찰 씨게 한 이야기



발단: 강박적 제주행


퇴사하니까 갑자기 제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김포공항행 서울 9호선 급행열차에 타 있었고 급하게 지하철 안에서 비행기표를 편도로 끊었다.


김포공항에서 탑승대기중 그린 그림, 뭘 할지 몰라 그림도구를 포함해 이것저것 챙겼다.


제주에 가면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와야 한다는 비장함 때문인지 아니면 밤늦게 도착해서인지 제주 공항에 내렸는데 이전과 같은 여행의 설렘과 흥분은 느낄 수 없었다.


노트북과 뒤엉킨 충전 케이블들, 생각을 정리해 줄 공책, 혹시 모를 모든 창작 활동을 대비한 휴대용 수채 도구들, 충동적으로 자연에 뛰어들 때를 대비한 등산화와 입수 도구. 무언가 성취해야겠으나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하고 복잡한 심경을 백팩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무거워진 백팩 때문일까.


서울 공기처럼 제주 공기도 무거웠다.





렌터카 상태 체크를 위해 찍어놨던 사진. 9월 19일(월) 오후 7시 47분 제주시 대기질 나쁨.


렌터카를 인계받고

내비게이션을 멍하니 응시했다.


도대체 어딜 가야 하나.

내가 원하는 곳이 어딜까.


1년에 한 번씩은 제주에 왔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뭔가 성취해야겠다는 욕심과 강박을 가지고 내려온 건 처음이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관광지도 아니며 인스타 감성 카페도 아니다. 예약하고 줄 서서 먹는 맛집도 아니다.


익숙함을 핑계로 내가 나태해졌던 공간, 스트레스와 나쁜 기억만 존재하는 공간을 떠나 새로운 영감, 긍정적인 기운을 되찾아줄 어떤 낯선 공간을 찾아 제주로 왔다.


제주에 바라는 게 많은 나, 육지인

낯선 공간은 당연히 제주의 자연에 품어져 있어야 하겠다. 높고 넓은 창 밖으로 아스팔트와 철근 콘크리트가 보이는 대신 바다가 보이거나 숲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걸론 충분하지 않다. 기본은 당연히 갖춰야 한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 적어도 높이 700mm 이상의 테이블, 2구 이상의 콘센트, 와이파이, 카페인이 있어야 했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걸까. 렌터카 시동을 끄고 앉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지만 내 기준에 마땅한 곳이 없었다. 만원 이상의 음료를 주문하고 앉을 수 있는 자리는 허리디스크를 유발할 등받이라곤 없는 구조물들 뿐이었다. 공간이 너무 힙해서 테이블도 힙-힌지 없이는 만질 수 없을 만큼 땅바닥에 붙어있었다. 당연히 콘센트도 없었다.


괜히 내려왔나...

어라?


그냥 좀 참고 돈 아끼면서 집에 있을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올 때 즈음 SNS에서 재밌는 키워드를 발견했다.



#워케이션


Work + Vacation

예전에 디지털노마드라는 말이 유행이었다면 이제는 워케이션인가 보다. 워케이션은 일과 휴식을 합친 개념인데 본질은 워라밸을 추구하는 디지털노마드와 같아 보였다.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엔 여유롭게 휴양을 즐기며 영감을 얻고 그 영감으로 다시 자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처음 만난 워케이션이라는 개념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워케이션이 대체 뭔지 정체를 밝히고 나면 내가 지금 제주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행선지를 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렌터카 시동을 켰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재택근무, 그리고 워케이션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비말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한 물리적 거리두기가 아닌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요상한 표현을 만들었다. 표현이야 어찌 됐든 갑자기 많은 일들(대부분 사무직)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재택근무를 실시하게 된다. 실제로 코로나 초기에 나도 재택근무를 강하게 회사에 요구해 본 적이 있다. 최근엔 갑자기 동료의 코로나 양성 판정을 이유로 출근하지 말라고 해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재택근무를 해보기도 했다.


재택근무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한다.

컴퓨터 환경과 원격 통신 수단을 사용하여 직장의 업무를 제3의 장소에서 행하는 원격지근무(Telecommuting). 범위가 넓어 일반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직장의 통제하에 근로자가 사무실 이외의 장소에서도 직장 일을 계속하게 하는 상황을 지칭한다.


근데 재택근무가 아닌 왜 굳이 워케이션?

재택근무라는 말에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직장 밖에서 일한다는 의미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같은 의미를 워케이션이라고 표현하는 걸까. 워케이션의 정체에 대해 계속 파고들어 봤다.



그러다 급발진-


놀고 있네


렌터카 시동은 켰지만 변속 모드가 아직 P, 주차모드라 속으로만 급발진해서 다행이었다. 인터넷에서 #해쉬태그 워케이션에 대해 알아볼수록 어떤 익숙한 괘씸함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비슷한 맥락의 괘씸함을 출근길마다 느꼈었다.


코로나 코미디

지하철이 만원이라 2번이나 타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는 열차 안에서 밖으로 사람들이 튕겨져 나오는 게 아닌가!


온갖 짐이 가득한 내 백팩 지퍼를 열고 닫을 때처럼 직장인이 가득한 만원 전철에서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사람들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이 이번엔 무조건 타겠다 작정하고 몰려오면 기관사는 다음 열차 타세요!라고 외치며 작두처럼 문으로 인파를 썰어버렸다. 그리고 그 작두날 같은 지하철 문에는 괘씸하게도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권장하는 작은 스티커가 반드시 붙어있다.


표현 자체만 보면 물리적 거리두기를 강제하진 아니하니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몸은 붙어있지만 그 불쾌한 신체접촉에 사람들이 서로를 진짜 혐오하게 돼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잘 시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열 받는데 이유를 모르겠네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나의 이런 삐딱한 자세가 워케이션을 향해서도 날을 세웠다. 지하철 트라우마가 발동해서 워케이션도 고도로 정교한 코로나 말장난같이 여겨졌나 보다. 도대체 왤까. 나는 과연 행선지를 정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제주에서 하고 싶던 게 결국 워케이션이었나?


내가 꽤 오랫동안 출발을 안하니 렌터카 업체 직원이 무슨 문제 있냐고 물어왔다. 20시가 넘어 오늘의 마지막 렌터카 손님이 된 나 때문에 직원이 아직 퇴근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머쓱해져서 일단 악셀을 밟았다.


워케이션, 정체가 뭐야?




"발리, 서핑, 디지털노마드"

-2부에서 계속


2부 - 발리, 서핑, 디지털노마드
https://brunch.co.kr/@dhalsrms3994/54


백수가 즉흥적으로 제주에 내려와 어디 나도 한번 워케이션? 은 무슨 워케이션 코스프레하다가 자기 성찰 씨게 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