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창하면 황진이고, 황진이 하면 시조창이다.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에>이란 평시조는 고등학교 문학에서 누구나 배운다. 황진이는 조선 최고의 여자 아이돌이자 작사, 작곡, 노래, 춤, 미모, 시재, 이 모든 것을 갖춘 예인이다. 자작곡을 만들어 부르는 그녀는 요즘 말로 싱어송라이터라고도 할 수 있다.
황진이는 기록에 나오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은 <송도기이(松都記異)>나 <어유야담(於于野譚)>과 같은 야사나 설화로 전해져 온다.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의 엄마는 <진현금>이라 불리는 기녀다. 엄마가 관청 소속 노비니 그녀 역시 조선시대 종모법으로 보면 자동적으로 기녀다. 기적에 오른 그녀의 이름은 <명월>로 개성 출신이다. 확실한 생존 연대는 미상이지만 그녀가 실존 인물임은 분명하다. 중종 때의 인물로 추측되는데, <수성지>를 지은 백호 임제가 그녀의 무덤가에 술을 따르며 훌쩍이며 지은 시조를 빌미로 삭탈관직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蘇世讓)(1486~1562)>에게 보낸 그녀의 이별한 정한을 담은 <봉별소판서세양>란 시가 전해지는 걸 보면 그렇다.
고전소설 <춘향전>에서 춘향에게 변사또가 ‘수청’을 들라 했는데, 춘향이 “지 몸은 지 것이 아니어라.”라고 하며 이몽룡을 향한 일부종사를 얼척없이 주장하다 곤장을 쳐 맞고 옥에 갇혔다는 이바구는 관노비 기녀에게 정절 지킴은 명분 없음을 보여 준다. 황진이 역시 신분상 ‘을’인 처지라 ‘갑’인 관리들의 수청을 피할 수 없었을 터.
그녀를 거쳐 간 여러 사대부들 중에 화류장화로 놀아준 비즈니스 상대남과 순수한 연정으로 몸을 준 정인도 있었을 것인데, 그 중 한 사내가 선전관 이사종이다. 훈남에 춤 잘 추고 멋들어지게 노래하는 이사종의 아티스트적 자질에 반한 그녀는 결국 그와 살림을 차렸다. 이제 황진이의 얼운님은 온리 이사종이 되었다.
그녀가 이사종과 동거를 하기 전, 짧은 이별의 시간 속에 쓴 시조를 소개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야지반'(夜之半)>-‘동짓달 기나긴 밤에’ 황진이
여기서 ‘얼운님’이란 한 이불을 덮고 운우의 정을 나눈 상대다. ‘혼<魂>, 백<魄>’은 얼이 서로 어울린다'라는 뜻으로 '사랑 행위를 하다'인 '얼우다'와 같은 말이다. 이에 반해 정신적인 사랑은 ‘괴다’를 쓴다. 예를 들어, 정철이나 맹사성같은 사대부가 쓴 임금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괴다’라고 한다. 그러니 만약에 실수로 ‘임금님을 괴다’를 ‘얼다’라 쓰면 주상을 능욕한 죄로 참형에 처해질 것이다.
은애(恩愛)하는 천민 가객 이사종에 반해 ‘얼’ 즉 ‘영혼, 넋’을 다 받친 그녀는 기녀 주제에 이사종 아내 코스프레로 6년간 계약 동거를 제안한다. 실제로 그녀는 3년간 이사종에 집에 들어가 살며 조강지처 눈칫밥 먹으며 첩질을 한다. 나머지 3년은 이사종이 황진이의 집에서 사위 역할을 하며 장모님의 병수발을 했다고 한다. 은애하는 남정네를 위해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하며 주부 코스프레를 한 황진이 일화를 모티브로 <이사종의 아내>란 가상 역사 소설을 쓴 소설가 한무숙은 당대 최고의 기녀 황진이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주부 역할마저 나눠 준 이사종 아내의 서러움을 상상으로 풀어낸다.
물불을 안 가리고 이사종에게 환장한 황진이가 얼운님(선전관 이사종)을 떠나보내고 썼다는 이 시조엔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동짓날을 맞이한 그녀의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해가 지자마자 밥 한 술 뜨고 잠을 청하는데 시간이 너무 안 간다. 황진이는 선전관 이사종이 동짓날 지나 꽃 피는 봄 어느 날, 출장 가는 길에 잠깐 들른다는 약조를 믿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님을 살뜰히 그리며, 애면글면했을 그녀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던 중 ‘아싸’하고 벌떡 일어나 앉아 이 시조를 지었을 거 같다.
이 시조에서 안타까운 기다림의 절정은 가지 않는 시간을 잘라서 시간이 모자랄 때 적금처럼 사용하는 거다. 그녀는 쓸데없이 긴 “동짓달 기나긴 밤을 잘라서 압축파일로 저장하기로 한다. 님이 오신 날 ”서프라이즈!“ 하면서 춘풍 이불 밑에 묻어둔 따끈따끈한 시간을 풀쳐 내고 싶다는 그녀의 신박한 발상은 가히 절창이다.
홍매화 눈꽃 사이로 새빨갛게 피어난 봄날 얼운님이 오신다. 님은 그녀와 짧은 밤을 보낸 뒤 옷고름도 못 매고 등을 돌리려는데, 그녀가 노래방 기계 서비스 시간 주듯 후하게 ”한번 더 놀고 가시게여“한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말하는 꽃이라 해서 <해어화>라 불리는 기녀, 가야금을 연주하며 선비들의 음주가무에 불려 다니는 기녀 중에 기녀 황진이는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면, 아마도 가야금 산조에 어울리는 <정가>를 불렀을 거 같다. 퓨전 국악 오디션 프로에서 정가를 부르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서 노래 잘 짓고, 잘 부르는 <황진이> 역할을 맡은 탤런트 하지원이 거문고를 연주하며 가곡창을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황진이의 대표작인 “동짓달 기나긴 밤”은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가 조선의 시 전부를 버릴지라도 이 시 한 수와는 바꿀 수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핵심 키워드---시간
사랑의 블랙홀 동짓달 기나긴 밤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에>를 읽다가 아인슈타인이 떠올랐다. 그녀의 시조는 사랑의 불랙홀에 빠지면 시공간을 조물락조물락거리며 늘이고, 줄이고, 펼치는 그녀의 내공을 보여준다. 기약 없이 님을 지루하게 기다리며 상상으로 즐기는 힐링여행이 45자 내외의 시조 안에서 이뤄진다.
<동짓달 기나긴 밤에>을 낭송하면서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우주 공간에 미아로 떠돌다 기적적으로 구조돼 지구로 돌아왔을 때 어린 딸은 80대 노파가 됐는데, 아빠인 주인공은 젊은 모습 그대로였다. 우주의 시간이 ‘블랙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지구의 시간과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황진이의 시 세계에도 ’시간의 블랙홀‘이 등장한다. 시간의 중간을 뭉턱 베어 구깃구깃 접어놨다가 필요할 때 풀어 내는 그녀의 시 짓기 스킬은 최고다.
시조는 창작자의 정서와 느낌, 메타포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하는 노래다. 기녀들은 자신이 속한 관할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만약에 경계를 허락 없이 넘어 님을 찾아 간다면 이건 바로 추노감이다. 드라마 <추노>의 주인공 장혁과 일행이 거품을 물고 도망 노비인 그녀를 잡아 관에 넘길 것이다.
실제로 만날 수 없다면 꿈에서라도 보려네, 이런 선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셉션>이란 영화를 보면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고, 더 명료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으로 유명한 레오르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인셉션>이란 영화에서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 기억을 조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추상적 시간을 눈에 보이는 사물처럼 믿게 해서 자르고 붙이는 천재 시인 황진이는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에>에서 남정네와 사랑할 시간을 적립했다. 그런데, 그 남정네가 만약에 소식도 없이 오지 않는다면?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해주는 반려 곤충이 있다. 한자어로는 ’실솔‘이라 부르는 ’귀뚜라미‘를 대신 보내 잠든 님을 깨워주면 된다.
조선시대 가객 박효관은 “님을 그리워하는 상사몽에 자신이 귀뚜라미의 영혼으로 빙의해 자신을 잊고도 발 뻗고 자는 님의 깊은 잠을 깨우겠다” 노래한다. 그리고 황진이는 너무 슬퍼할 기운이 있으면 남는 시간들 적립해서 다음에 님과 함께 쓰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