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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일구 Nov 20. 2024

곡선의 파파노, 직선의 런던 심포니가 이룬 조화

24. 10. 03 런던심포니 내한공연 리뷰

음악저널 11월호


안토니오 파파노, 유자 왕,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클래식 업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 피아니스트, 오케스트라의 조합은 이름만으로도 기대를 모았다. 프로그램 역시 감각적이었다. 베를리오즈의 로마의 사육제 서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그리고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까지.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서 드물게 연주되는 작품들이라 더욱 기대를 자아냈다.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 조합의 첫인상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던 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가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런던 심포니는 단원들의 훌륭한 기량을 바탕으로 지휘자나 레퍼토리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연주를 펼칠 수 있는 세계 최정상의 악단이다. 이 둘의 조합이 최대 관심사였다.

로마의 사육제가 롯데콘서트홀에서 처음 울려 퍼지는 순간 상당히 놀랐다. 내가 생각하던 런던 심포니의 사운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런던 심포니 특유의 직선적이고 강렬한 소리 대신, 섬세하고 따뜻한 음색이 홀을 채웠다. 지휘자 파파노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사려 깊은 음악을 만들어냈다. 부드러운 음색으로 세심하게 연주한 잉글리시 호른 연주도 일품이었다. 곡이 진행될수록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활기찬 로마의 축제 분위기와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좋은 시작이었다.


-레퍼토리를 타지 않는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대체불가의 피아니스트이다. 화려한 패션과 무대 장악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피아노 실력으로 꾸준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개성으로 똘똘 뭉친 그녀의 연주와 음반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비평가와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작년에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LA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기도 했던 유자 왕은 이날 공연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유자 왕은 처음부터 강렬한 다이내믹과 폭발적인 에너지로 오케스트라에 맞섰다. 복잡한 기교를 가볍게 소화해 내는 모습은 역시 유자 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1번 협주곡이 가진 감정의 진폭이 큰 부분들도 세련된 해석과 능숙한 연주로 처리했다. 다만, 루바토나 여유를 많이 두지 않고 빠르게 진행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다소 아쉬웠다. 조금 더 곡을 음미하며 감상하고 싶은 내 욕심이었을까. 또는 이 조합을 오래 듣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휘자 역시 유자 왕의 연주에 맞추어 오케스트라를 민첩하면서도 유연하게 조율했다. 결론적으로 유자 왕의 라흐마니노프 1번 연주는  탁월했다. 관객들의 박수가 이어지자, 즉석에서 아이패드를 넘기며 앙코르도 세 곡이나 선사했다. 유자 왕은 레퍼토리를 타지 않는다. 어떤 곡이든 관객들과 음악으로 여유 있게 소통한다.


-장엄함과 서정미가 담긴 생상스의 걸작

오랜 바람을 이룬 날이다. 언젠가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제대로 들어보고 싶었다. 롯데콘서트홀이 자랑하는 리거(Rieger) 오르간의 깊고 부드러운 소리는 다층적인 음색을 들려주며 홀을 가득 채웠다.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는 그 소리를 세심하게 받아내며 연주를 이어갔다. 오르간과 오케스트라가 합쳐지는 초반에는 서로의 타이밍이 살짝 어긋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단원들이 오르간 소리를 경청하며 점차 조화를 이루었다. 곡이 끝날 무렵에는 하나가 되어 큰 울림을 만들어냈다.

이 곡을 들을 때 사실 기대하는 부분은 1악장과 2악장의 두 번째 파트에서 오르간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날은 감동이 다른 데서 왔다. 바로 1악장과 2악장 초반부의 연주였다. 1악장 도입부는 마치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등 독일의 선배 작곡가들을 떠올리게 했다. 파파노는 매혹적인 분위기로 악단을 이끌었고, 낭만주의 관현악의 진가를 느껴볼 수 있었다. 2악장 도입 또한 대단했다. 현악, 타악, 관악까지 모든 파트가 뛰어난 합주력을 보여주었다. 아쉬운 파트가 없다 보니 곡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다가왔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서정미와 오르간이 등장한 이후의 장엄함이 동시에 전해졌다. 처음엔 지휘자와 악단에 초점을 맞추면서 감상했지만 점점 작곡가 생상스의 음악 자체가 마음 깊이 와닿았다. 최고 수준의 해석과 앙상블이었다.

앙코르는 생상스보다 20살 후배의 작곡가, 포레의 파반느였다. 앙코르에서도 현악기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앙상블과 플루트 주자의 훌륭한 솔로가 이어지며 공연의 감동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앞으로 펼쳐나갈 이들의 음악

파파노는 자신이 오랜 시간 몸담았던 두 단체와 결별하고, 이제 런던 심포니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런던 심포니의 시즌 전체 프로그램을 보면 파파노가 얼마나 야심차게 이 악단과의 활동에 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날의 연주도 그랬다. 그들은 청중들의 높은 기대에 부응했다. 연주에 대한 만족은 자연스레 앞으로 보여줄 활동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의 조합은 이제 시작이다. 그들이 앞으로 보여줄 음악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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