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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5. 2018

욕망과 무망 사이에서

영화 <퍼스널 쇼퍼>를 보고

※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음산한 공기가 마른 낙엽에 스며들고 낯선 암연의 공간은 오랜 침묵을 머금고 있다. 별안간 루이스라는 이름이 무언의 공백을 채우기 시작한다. 모린은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모린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영매다. 그녀는 아득한 어둠 속에서 죽은 쌍둥이인 루이스의 영혼을 찾고 있다. 하지만 미지의 기운은 그저 싸늘한 공가를 맴돌 따름이다. 그렇게 생경한 밤은 살갗을 스치며 고요하게 침잠한다. 


<퍼스널 쇼퍼>는 상당히 기민한 영화다. 정적과 격정 사이를 조율하며 불규칙한 감정의 파동을 일으키는 연출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종종 스타카토의 형태로 개입되며 단조로운 서사의 결을 깨는 서스펜스는 인물의 다층적인 심상을 조명하는데 일조한다. 가시적인 현세와 비가시적인 내세를 동시에 경험하며 자아의 존재적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인물의 고뇌와 자기탐색의 과정을 짚어나가는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모린은 유명인사의 쇼핑을 대신 해주는 퍼스널 쇼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녀의 일상은 극단의 단절감을 야기한다.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선택하는 순간이 지나면 협소한 단칸방에서의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오직 전등 하나만이 그녀의 등 뒤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실 모린의 삶도 그림자와 같다. 그녀는 부유한 삶의 일부를 대리하며 무언가를 선택할 순 있으나 결코 소유할 수 없다. 그나마 남은 선택의 영역마저도 고용주인 키라의 취향에 종속된 상황이다. 결국 그녀의 현재는 온전한 자아가 개입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모린은 자신의 직업적 체험을 애증의 형태로 수용하고 있다. 일을 마친 밤마다 그녀는 환멸의 정서를 토로한다. 자극적인 미에 집착하는 세계의 얕은 층위를 가늠하며 이성적인 조소를 던지는 것이다. 또한 키라의 존재가 과도하게 자신의 일상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도 내비친다. 하지만 해가 밝으면 그녀는 다시 화려한 세계로 복귀한다. 그리고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본능적으로 동경의 시선을 투영한다.


일을 하는 매순간이 내밀한 욕망의 기제가 되는 셈이다.



영화 전반에서도 모린의 사소한 욕심은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디자이너가 의상을 입어볼 것을 권유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언제나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유하는 삶의 찰나를 만끽하며 소극적이면서도 주체적인 탐닉을 시도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많은 물품을 골라가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모린은 물욕의 정도를 극대화하면서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쾌감과 심리적 해방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듯 키라의 삶이 자신의 존재감을 희석시킬 때마다 그녀의 물욕은 더욱 선명하게 발현된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퍼스널 쇼퍼라는 삶이 조각한 자아가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생존 방식인 셈이다.



지난한 내적 갈등의 연속에 놓인 모린에게 익명의 문자는 새로운 감각의 전이를 불러온다.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는 그녀에게 욕망의 근원을 묻는다. 무엇을 왜 원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타인의 의지를 대리하는 퍼스널 쇼퍼의 삶에서 철저히 숨겨야만 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문자 속의 존재가 계속 봉인된 영역을 자극하자 모린은 비로소 자신의 행적을 돌아본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을 문자로 적어 익명의 존재에게 보낸다. 무형의 마음이 시각화된 문자로 전환되는 순간은 비로소 그녀의 진의에 대한 확증을 남기게 만든다. 더불어 모린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직선적인 방향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간 자신이 보조했던 타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식하고 싶은 욕망이 의식의 선후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모린이 살아온 일상의 관성을 비트는 단계로 접어든다.


영화에서 문자 메시지가 가지는 의미는 직관적이면서도 섬세하다. 익명의 존재는 모린에게 금기로부터의 일탈을 종용하며 그 순간의 감정을 묻는 질문들을 연달아 던진다. 그럴 때마다 앵글은 언제나 자판 위에 있는 그녀의 손도 함께 담아낸다. 솔직한 심경을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두려움이 손이라는 신체를 통해 미세한 떨림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분이다. 


유독 난감한 이야기가 지속되면 모린은 비행기 모드를 설정하는 방어기제를 내세운다. 이는 단절이라는 간극을 설정하면서 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을 잠재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와 다시 연결되자마자 무수히 쏟아지는 상대의 문자는 극도로 긴장한 그녀를 거세게 압박하며 응축된 서스펜스를 격발시킨다. 이렇듯 수축과 이완을 유연하게 반복하며 모린의 심연에 가닿는 문자 메시지는 심리적인 서사 전달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영매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린에게 가장 큰 난관은 정확한 정보의 부재다. 그녀는 문자를 주고받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며 자신이 애타게 찾는 루이스의 영혼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영화는 궁금증이 유발될 수 있는 대목마다 암전 효과를 개입시키며 본질적인 해답에 다다를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킨다. 막막한 상황에서 그녀는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오직 확실한 정보는 루이스가 살아있을 때 그녀와 했던 약속이다. 바로 먼저 죽은 사람이 현세의 상대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모린은 과거의 약속에 의존한 채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간적인 개념의 초점이 엇갈린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모린은 현재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정체성을 구축하지 못하는 퍼스널 쇼퍼의 삶을 부정하며 더 나은 자아가 존재할 수 있는 미래를 바라보는 셈이다. 하지만 영매이기도 한 그녀가 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현재다. 익명의 문자로 소통하는 시간이나 영적인 기운을 느끼는 것은 모두 현재의 순간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처럼 퍼스널 쇼퍼의 자아와 영매의 자아가 각기 존재하는 시간은 교차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는 그녀의 현실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촉매로 작용한다.



모린의 자아와 일상은 각자 이분화의 과정을 거치며 끝내 존재적인 의문을 끌어온다. 불분명한 타자의 존재를 거울로 삼아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현재의 자아를 부정하는 내가 살아가는 지금은 어떤 시간이며 그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상과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조차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전반을 걸쳐 이어지는 모린의 복잡한 심리는 일종의 자기 파괴적인 단상을 마련하는 것으로도 보이게 된다. 또한 이런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가 영화 속에서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루이스라는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영혼이 산 자의 삶을 격렬하게 흔드는 것은 결국 모린 스스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자아의 윤곽을 명확히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흐려졌던 인지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면밀함과 신선한 충격을 동시에 수반한다. 다시 나타난 영혼에게 던지는 질문의 범주에는 더 이상 타자만 존재하지 않는다. 모린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는다. “그럼, 나야?” 그리고 고요한 침묵을 깨는 쿵 소리가 들려온다. 영매인 자신이 루이스라 여겼던 영혼과 등치되는 순간이다. 언제나 지금을 거부했던 그녀는 결국 지금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영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오직 현재만 존재하는 시간의 영역에서 모린은 비로소 하나로 남게 된다.


<퍼스널 쇼퍼>는 모호하면서도 명확하다. 자신의 존재는 모든 가능성의 시발점이다. 스스로 체험한 오감을 바탕으로 형성된 인지적 차원이 과연 나라는 자아를 온전하게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영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 속의 모호함은 곧 현실과 다르지 않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모린의 마지막처럼 말이다.



다시 영화의 초반이다. 모린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추상회화를 보며 열린 문을 그리고 있다. 미래가 도래하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던 과거의 추상화. 그리고 영혼과 통할 수 있는 열린 문. <퍼스널 쇼퍼>는 말한다.


현재는 또 다른 현재를 만나 생동하기도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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