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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4. 2018

외로운 환상의 변주곡

영화 <꿈의 제인>을 보고

인생은 시시한 불행의 연속이다. 그 위에 종종 뿌려지는 행복은 삽시간에 휘발된다. 이토록 모진 운명은 외로움을 타고난다. 그리곤 인내할 수 없는 고독에 질식한다. 혼자라는 전제가 수반하는 지독한 수렁이다. 그래서 제인은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인 집에는 선의의 낭만이 부유한다. 순수한 행복을 적신 몸은 춤을 추고 냉엄한 현실의 경계는 미러볼의 불빛 아래 흐려진다. 



소현은 외롭다. 쓸쓸한 감상에 젖은 편지가 처연한 애성을 타고 들려온다. 그녀에게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의 흔적은 습관처럼 찾게 되는 꿈이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꿈은 결코 지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잔인한 현실의 감각이 허망한 꿈의 서사를 교직할 따름이다. 이처럼 양가적인 감정의 선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소현에게 별안간 제인이 나타난다. 따스하고도 나른한 몽환의 온기가 차가운 소현의 몸을 감싼다. <꿈의 제인>은 그렇게 스며든다.



영화는 제인이라는 존재를 활용하며 현실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전이시킨다. 하나의 세계에서 교차하는 행복과 불행은 두 개의 삶으로 양분된다. 우선 소현에게 제인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제인은 불행을 확신한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찾아올 행복도 확신한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치기 어린 낭만을 체현한다. 그리고는 함께 사는 아이들과 은은한 달빛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연대한 달빛은 한데 어우러진 이들의 그림자를 조명한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소현은 미소를 짓는다. 함께 하는 행복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독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다.


아니,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제인이 사라진 삶은 서늘한 불행만이 선명하다. 팸이라는 문화에는 피상적인 연대감만 가득하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상흔으로 얼룩진 서로의 폐부를 사정없이 관통하고 함께 사는 공간에는 불신의 정서만 팽배한다. 그 사이에서 소현은 군중 속의 고독에 사로잡힌다. 육체의 고독은 피했을지언정 마음의 고독은 끝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잔인한 모순의 간극에 빠진 소현은 끝내 팸의 문화를 오롯이 수용하지 못한다. 고독은 여전히 처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제인이 떠오른다.


극단의 정서를 조율하며 누군가의 삶을 철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조각하는 힘을 머금은 채.


불안정한 소현은 자신의 내재된 욕망을 투영시킬 대상을 찾는다. 지수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녀는 당차게 일을 하며 삶을 꾸려나가고 혼자가 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소극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는 소현에게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녀가 꿈꾸는 삶을 실현하는 방법은 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소현은 지수에게 새로운 팸을 구하면 자신도 함께 갈 수 있냐고 묻는다. 같이 사는 것은 힘들지만 언제든지 놀러 오라는 지수의 말에도 그녀는 흡족하다. 때때로나마 함께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쓸쓸한 일상을 감내하던 존재는 그렇게 새로운 연대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영화는 지수의 죽음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존재했던 희망의 통로를 제거한다. 소현은 지수의 삶에 동화되어 절망 속의 희망을 궁구했다. 그러나 지수도 혼자 온전할 수 없는 삶이다. 소현은 지수로부터 힘을 얻었지만 정작 힘을 주지는 못했다. 교감의 층위를 놓고 본다면 이들의 연대감은 일방적인 갈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부당한 팸의 질서를 깨뜨리고자 노력하는 지수의 모습은 소현에게 그저 경외의 대상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등치될 수 없는 이질적인 삶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변할 용기가 없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현실을 관망하던 소현이 맞이한 것은 결국 이상의 추락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휩싸인다. 마치 나 자신이 추락해 일어설 힘을 잃은 것 같은 무력감 속에 다시 외로움이 찾아온다. 결국 잔혹한 현실은 소심한 그녀의 욕망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인의 존재는 소현에게 더욱 특별하다. 제인과의 관계는 그저 지금의 나로 존재해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우선 두 사람은 모두 정호라는 존재를 갈구한다. 제인은 정호를 짝사랑했다. 그녀는 감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 정호의 근황을 궁금해한다. 소현 역시 정호를 애증의 존재로 여긴다. 자신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줬던 존재이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떠나 외롭게 만든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호는 두 여자의 불행에 짙은 점 하나를 찍고 사라졌다. 행복이라는 그 점은 끊임없이 제인과 소현을 과거의 향수로 소환한다.


이런 현실로부터 파생된 두 번째 공통점은 바로 결핍의 정서다. 제인은 정호와 어우러지는 진정한 사랑을 오직 꿈에서만 완연하게 느낀다. 그거면 됐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체념의 정서가 느껴진다. 결핍의 고통과 치열하게 맞선 자의 낭만적인 항복이다. 도벽 같은 자잘한 일탈로 갈음되는 공허한 마음은 한없이 애잔하다. 소현 역시 마찬가지다. 정호가 떠난 후 언제나 그녀는 외로웠고 채울 수 없는 안정감을 찾아 방황했다. 막연한 공포가 잠식한 시간은 그녀로 하여금 결여된 자존감으로 피폐해진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모두 원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삶이기에 제인과 소현은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각자의 짙은 연민에 옅은 미소를 곁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명하게 달랐던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지 않으면서 말이다.



영화는 꿈과 현실을 비선형적인 내러티브의 형태로 배치시켜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가령 소현이 현실에서 마주한 존재들은 꿈에서 재창조되어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새로운 존재들로 이뤄진 꿈속의 관계는 낭만적으로 느껴질 만큼 조화롭다. 하지만 현실보다 앞서 제시되는 꿈의 세계는 후반부로 흘러갈수록 지난한 현실에 대한 소현의 저항의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여실히 방증한다. 또한 제인이 비현실적인 행복을 나열하는 모습도 나중에는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느끼는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결국 역순으로 연출된 서사는 낭만의 탈을 쓴 현실의 본질을 더욱 섬세하게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혼재된 꿈과 현실이 휘몰아치고 소현은 제인이 있는 곳에 다다른다. 이름은 뉴월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제인이 나타난다. 무대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솔직한 고백을 꺼낸다. 불행의 역사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거짓됐는지를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쩌다 행복한 순간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윽고 영원히 불행하자는 말이 정적 속을 공명한다. 순간, 행복한 꿈과 불행한 현실은 공생할 수밖에 없는 역학관계에 놓인다. 적어도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렇다. <꿈의 제인>이 노래한다.


부디 오래 만날 수 있길. 불행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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