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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2. 2018

선명한 거짓말, 애달픈 감상

영화 <프란츠>를 보고

세상은 어두워졌다. 느른한 종소리가 복작이는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다. 안나는 무덤 앞에 섰다. 낯선 꽃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프란츠의 죽음을 기렸으리라. 잔혹한 전장에서 아스라이 스러졌을 청춘에 대한 헌화다. 꽃의 색은 알 수 없다. 잎은 생기를 잃었다. 오직 검게 물든 봄의 공기만이 자연이 조각한 예술의 탄탄한 숨결을 거둬들였다. 찬란한 젊음을 머금은 프란츠의 온기가 사그라진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소리 없는 절규가 공명한다. 상실의 정서도 잔인하게 선명하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약혼자였던 청년은 몸도 없이 돌연한 죽음으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전쟁의 상흔은 막막한 그리움을 만감의 호수에 빠트렸다. 그렇게 독일은 애처롭게 허우적거리며 무한한 애상에 젖었다. 이처럼 영화는 시종일관 추동하는 삶의 활력을 빼앗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애절하고도 무기력한 정서만이 감내하기 힘든 시대를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프란츠>는 흑백의 정서가 지니는 무게를 정확히 안다. 숙연하게 내밀한 심리를 보듬는 차분함은 이질적인 서사 사이의 장력을 더욱 팽팽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인인 아드리앵의 등장은 자연스럽다. 그의 얼굴은 승전국의 자신감이 아닌 겸허한 애환으로 가득하다. 죽은 프란츠를 생각하며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는 아드리앵은 안나의 가족으로부터 맹목적인 적개심을 걷어낸다. 


이렇게 단절된 두 서사가 연결되면서 영화는 보편의 정서로 전환을 시도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모두 자식의 죽음을 건배하는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하는 한스는 사뭇 결연하게 느껴진다.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라는 슬픈 사실을 기어이 수용한 자의 숭고함은 색깔이 없어도 영롱한 빛을 발한다. 

흑백의 플롯 사이에 간헐적으로 채워지는 색채는 점진적으로 감각의 진폭을 넓힌다. 영화에서 색이 쓰이는 대목은 모두 현실로부터의 일탈이다. 아드리앵과 안나가 수영을 하는 장면이나 프란츠와 아드리앵의 관계가 서술되는 장면 모두 현실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감정의 선을 타고 있다. 무거운 현실에서 찾기 힘든 행복이 완연한 색채 사이로 비춰지는 순간 애틋한 환상이 도래한다. 일전에 마주했던 슬픔이 모두 지워진 것처럼 궁극의 기쁨과 위안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색채가 드리운 세상에서도 아드리앵은 불안하다. 불안한 내면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프란츠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그의 폐부를 깊숙하게 찔러댄다. 결국 그는 안나에게 절박한 자기고백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프란츠의 친구는 사라진다. 다시 세상은 어두워졌다. 엄혹한 현실에는 오직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만 했던 프랑스의 군인만이 남는다. 영화의 색은 안나를 배신했다. 더 나아가 프란츠의 부모도 배신했다. 달콤할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웠던 색의 세계는 죄책감이 그려낸 환상이었다. 결국 전쟁이라는 현실에게 낭만적인 교집합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시, 흑백의 정서는 더욱 무거워진다.

안나는 상실의 애환을 기만한 자를 단죄하지 못한다. 그녀는 거짓의 무게에 휘청거리며 고뇌했던 아드리앵의 시간을 연민하고 모종의 애정마저 느낀다. 끝내 아드리앵이 건넨 진실은 화로 속에 던져졌다. 이제 안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공허한 현실을 채워줬던 그를 찾아 파리로 떠나는 것이다. 그녀는 승리의 세계를 배회하며 아드리앵의 흔적을 더듬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승전국의 위대한 자존감일 따름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의 앞에는 마네의 그림이 놓인다. 자살한 청년의 그림. 그 순간 형언할 수 없이 고독한 소외감이 그녀의 시선을 감싼다. 

이렇듯 영화는 배치되는 두 공간을 교차시키며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겹겹이 쌓아올린다. 아드리앵은 패자의 공간에서 용서를 구했고 안나는 승자의 공간에서 용서와 사랑을 주고자 한다.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이상성은 본능적인 선택의 산물이다. 하지만 본연의 감정이 재단할 수 없는 현실의 참상은 끊임없이 장애물을 형성한다. 적국에서 두 사람은 자신의 이름만으로 온전할 수 없다. 세월이 곡진하게 빚어낸 조국의 정체성은 필시 그들을 적대적인 격랑 속에서 표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프란츠>는 철저하게 분리된 상황적 테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군상을 조명하며 다소 동질적인 감상을 끌어내는 묘한 경험을 선사한다.  


안나는 마침내 아드리앵을 만난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가 구현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와 더불어 사랑을 전하러 도착한 프랑스에는 독일에서 만났던 아드리앵은 없었다. 오직 마음의 짐을 덜고 평온한 일상과 새로운 사랑에 안착한 젊은 청년만이 있을 뿐이다. 안나는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막연한 희망을 확신으로 치환했다. 잠시 어두운 세상에 입혀졌던 색이 거짓의 징표였다는 사실을 잊은 채 다시 그녀는 색을 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드리앵과 인연이 될 수 없는 현실은 안나에게 다시 묵직한 상실감을 안긴다.

<프란츠>에서 색은 위선이다. 정서의 유토피아를 형성하며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아름다운 거짓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 애처로운 기만은 이기심의 발로이자 그럴싸한 회피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인물들이 목도하게 되는 현실은 정직하게 각자의 죄의식을 관통한다. 삽시간에 커진 삶의 흠결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급기야 현실을 부정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현실적인 명분과 당위성을 거론하며 흑백의 현실에 색을 덧칠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점차 원죄의 본질은 흐려지고 거짓 속에서 평안을 얻는 이들은 안도한다.

다시 안나는 마네의 그림 앞에 선다.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 묻는 한 남자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네.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주니까요.” 그녀는 자살이라는 테마에서 삶의 의지를 찾았다. 역설적인 감상이 의아하게 다가올 즈음 화면에 다시 색이 입혀진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상상의 시간이 찾아왔다. 현실만큼 처절한 그림 앞에서 안나는 과연 진실했을까. 그리고 유난했던 색의 환상은 끝난 것일까. 문득 그림 속 침대에 묻은 선혈이 더욱 붉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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