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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5. 2018

질곡의 삶엔 우아한 선율이 있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를 보고

쳇 베이커의 트럼펫은 섬세한 관능을 타고 흐른다. 차분하게 삶의 굴곡을 그려내는 그의 연주는 애상과 환희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가로지른다. 이윽고 퍼지는 서정적인 리듬은 삽시간에 오감을 저며 온다. 그래서인지 그의 재즈는 한없이 부드럽다.


목가적인 풍경을 수놓는 선선한 풍편처럼 말이다. 


하지만 <본 투 비 블루>가 그려낸 그의 삶은 격렬한 풍파로 가득하다. 무너진 천재의 재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의 자아는 어느새 호사로운 사치로 남았다. 오직 영화에는 평범한 삶에서조차 이탈한 위태로운 진실만이 존재한다. 이토록 선명히 대치되는 이질감은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침잠하는 인간성을 치열하게 조명한다.



영화는 쳇 베이커의 역사에 과감하게 직조한 픽션을 주입한다. 사실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그린 영화에 출연한 적도 없었으며 제인이라는 여성과 인연을 맺지도 않았다. 하지만 <본 투 비 블루>는 전반부에 이 모든 상상을 내세우며 발칙한 연출을 선보인다. 그렇게 아련한 과거로 회귀하는 흑백의 쳇 베이커는 의외로 불안하고 초라하다. 찬란했던 영광을 연기하는 뮤지션의 얼굴에는 어둡고도 막연한 희망만이 부유한다. 그리고 다시 색이 칠해진 그의 현재는 여전히 피폐한 절망으로 가득하다. 고독한 그의 곁을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제인의 모습은 처절한 상상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영화는 병치된 극단의 시간에 달콤한 거짓을 덧칠하며 애환의 심연을 드러낸다.


예술과의 고단한 사투로 점철된 삶은 황량하다. 부러진 치아 사이로 퍼지는 혼신의 숨결은 불안하게 떨리는 트럼펫 소리로 재현된다. 덩달아 마약에 찌든 영혼은 몽환 속을 헤매며 붉은 선혈을 흘릴 따름이다. 이렇듯 쳇의 현실에는 분명한 장애물이 존재한다. 결코 쉽게 반등할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천명한 후에야 영화는 이 절체절명의 존재를 잔잔한 평온의 순간으로 이동시킨다.



그는 제인과 고향으로 돌아가 설원 위에 서서 다시 트럼펫을 불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찔한 고통을 머금을 때마다 그의 일상에는 짤막한 희망의 단초가 던져진다. 캠핑카를 타고 푸른 자연을 누비며 부드러운 재즈의 감성을 회복하는 쳇의 모습에서 흐려졌던 삶의 의미도 다시금 뚜렷해진다. 이처럼 모진 시련을 이겨낸다는 진부한 클리셰조차 쳇 베이커의 트럼펫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삶 자체를 음악에 녹여내는 뮤지션의 숙명은 깊어진 감성으로 돌아와 남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는 쳇의 천재성을 과감하게 무너뜨리면서 지극히 평범한 세계를 마주하게 한다. 제인은 그 세계의 중심에서 미숙한 천재의 추락을 어루만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대비된다. 쳇은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재기의 궤도에 올라서지만 제인은 배우의 꿈을 원하는 대로 이뤄내지 못한다. 끝내 그녀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아픔을 꺼내기에 이른다. 

천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새어나오는 한숨은 촘촘했던 천재의 아집을 맹렬하게 비집고 든다. 그는 생경한 이질감에 휩싸였지만 기어이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세상을 넓히는데 성공한다. 이는 원숙한 감성으로 채색된 쳇 베이커 인생 2막을 끌어오며 오묘한 풍미를 선사한다. 이처럼 <본 투 비 블루>는 사랑이란 기제를 통해 불안하게 방황하는 삶에 안정적인 쉼터를 제공한다. 그리고 쳇은 자신이 분신처럼 여기는 트럼펫의 밸브링을 반지처럼 건네며 사랑을 고백한다. 그제야 비로소 은은한 조명의 낭만과 함께 어두운 삶에도 따스한 온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쳇이 부르는 <My funny valentine>은 플롯 전반의 정서를 함축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자신의 어둠을 어루만져줬던 이에게 바치는 달콤한 순정은 예술적인 헌사로 다가온다. 더불어 에단 호크의 여린 음색은 지친 쳇 베이커의 영혼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마치 험난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그의 가사 한 구절마다 감각적인 방점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그의 삶은 고통스러웠고 구제받지 못한 순간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이 모여 만들어 낸 음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매력과 성숙미를 발산한다. 또한 ‘funny'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음울한 멜로디는 역설적으로 진지해진 그의 음악적 자아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



쳇 베이커는 자유를 갈망한다. 그는 쇠잔한 심신을 이끌고도 재기와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예술적 존재로 자신이 온전할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갈망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에 이중적인 잣대를 제시한다. 끝내 뉴욕의 버드랜드로 돌아온 그의 앞에는 오직 무대와 헤로인만이 존재한다. 순수한 열정과 충동에 찌든 마음은 격렬하게 상충하며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결국 그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며 울먹이면서도 마약을 갈구한다. 위선적인 자신을 지켜내는 것은 그에게 결코 구원이 아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토록 이기적인 천재에게도 쓰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 영화가 주는 최선의 면죄부를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트럼펫 소리가 버드랜드의 어둠을 뚫고 나온다. 음색은 짙어졌지만 쳇은 여전히 어둡다. 찬란했던 시절을 수놓은 자신감은 공허한 눈빛에 가려졌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본능의 유혹에 예속된 채 그는 다음과 같은 가사를 읊조린다. “용서해줘요. 무력하게 껴안은 이 몽롱함을. 지금껏 사랑에 빠져본 적 없죠.” 이 낭만적인 변명과 함께 울려 퍼지는 재즈는 불안하게 아름답다. 불편한 감정을 희석시키는 몽환의 끝에서 그는 나지막이 영화의 제목을 말한다. ‘Born to be blue'.


아직도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푸른 꿈에 살리라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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