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 시점 Oct 15. 2018

그대는 찰나의 주마등처럼 스쳐가네

영화 <춘몽>을 보고

수색동은 예스러운 정감을 자아낸다. 소박한 장터의 내음은 아릿하게 코끝을 찌르고 해진 벽 사이의 노을은 무른 가슴을 저민다. 흑백으로 칠해진 이곳의 공기에는 농밀한 애증의 정서가 배어 있다. 오랜 아픔을 보듬었던 억겁의 세월이 느껴지기 때문일까.


골목의 모퉁이를 돌면 작은 주막이 나온다. 이름은 고향 주막. 순수의 시절을 그리며 적막한 일상의 때를 씻어내는 곳이다. 소주 한 병을 둘러싼 고향의 색채는 다양하다. 시의 모습을 띤 고향부터 이름조차 모를 고향까지. 등장인물들은 고토의 이름에 저마다의 아픔을 새겼다. 그리고 시간의 힘을 빌려 선명한 아픔을 옅은 감상으로 승화시킨다. 그렇게 절절한 노스탤지어는 미처 더듬지 못했던 기억의 사각지대로 스며든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예리와 세 남자의 삶은 변변찮다. 그들은 결핍과 아픔으로 버무려진 일상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오묘한 매너리즘에 젖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태도가 염세적이지는 않다. 네 남녀는 애틋한 연대의식을 통해 자잘한 낭만을 취한다. 함께 들꽃을 바라보며 봄의 향기를 느끼거나 햇살 아래 낮잠을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아픔이 다른 아픔에게로 다가와 부대끼는 순간 현실은 몽환적인 꿈으로 변한다. 비로소 낯선 온기가 주는 나른함을 안고 경직된 일상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이들을 수식하는 단어에는 애환이 가득하다. 간병인, 간질 환자, 건달, 탈북자. 그럼에도 비슷한 삶들이 한데 모여 채워나가는 일상은 꽤나 생기가 넘친다. 그들은 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며 늦은 밤의 거리를 함께 거니는 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슬플 때도 그들은 함께 있다. 각자 고단했던 일상을 서로 씹어주기도 하고 삶의 빈틈을 세심하게 살펴보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순간들에는 연민의 눈빛이 선명하다. 사랑과 안타까움이 얽힌 관심과 함께.



세 남자는 예리를 연모한다. 그녀의 아버지를 장인어른이라 부르기도 하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육체적인 접촉을 바라는 짓궂음도 서슴지 않고 내비친다. 언제나 주막에서 마주할 수 있는 그녀의 존재가 방랑하는 세 영혼에게는 안식처와도 같은 것이다. 예리도 세 남자를 좋아한다. 혈혈단신으로 아버지를 간병해야만 하는 절박함 속에서 장난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은 분명 휴식과도 같은 존재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간명하고 필연적인 관계인 셈이다. 각자의 결핍을 서로의 존재를 통해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남녀는 수색동의 한 낡은 옥상에 모인다. 그리고 건너편에 보이는 상암동의 화려한 건물을 바라본다. 갑자기 익준이 이렇게 말한다. “난 저기 죽어도 가기 싫어. 저기는 사람 냄새가 안 나.” 투명한 유리 건물은 사람들의 겉모습만을 비추기에 급급한 세상의 첨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익준에게 수색동은 다른 의미로 투명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비록 투박하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가식 없는 진심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매정한 세상을 욕지거리로 일갈하며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지금이 그들에게는 꿈보다 달콤한 일상이다.


그렇게 막연했던 옥상에 몽환의 순간이 찾아온다.



예리는 일어나서 춤을 춘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고 제자리를 맴돌며 비틀거린다. 그녀의 동선을 따라 비춰지는 옥상에 웬일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화면 위로 떠오른다. 봄날의 꿈. 30분이 지나서야 등장한 제목 옆에는 예리만이 쓸쓸하게 앉아있다. 앞서 마주했던 그들의 행복과 미소는 사라졌다. 일상의 소음을 걷어냈던 그녀의 손짓은 그저 오롯한 정적만을 남긴다. 그리고 순간의 미학은 영화 전반을 잠식한다.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단 1분의 춤사위가 지워버린 세 남자의 흔적은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예리는 아저씨를 외치며 그들의 존재를 갈망한다. 실낱같은 순간은 그렇게 추억할 만한 과거가 된다. 따스한 춘몽처럼.



영화는 운율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욕탕에서 정범이 흥얼거리는 노랫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정범에게 슬픈 눈은 생존을 방해하는 현실이다. 아무 것도 없는 그가 현실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과거다. 그리고 행복한 추억의 공간에는 예리와 익준, 종빈이 있다. 정범은 이 노래를 통해 그들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현실의 검은 때를 벗겨내는 것이다. 때마침 목욕탕으로 들어온 익준과 종빈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과거의 존재는 누군가의 허망한 현재를 채워주며 새로이 추억할 과거를 만든다.  


예리에게 건네지는 주영의 시도 서로의 시간을 노래한다. “당신을 보낸 나는 떠나지도 남지도 않겠지만 백두산의 안개를 밀어내는 건 또 다른 안개이듯, 천지의 물을 흘려보내는 건 또 다른 물이듯, 그리움을 밀어낸 그리움의 자리엔 제 자리 하나쯤은 남지 않겠어요?” 오늘은 반드시 어제가 되고 내일은 반드시 오늘이 된다. 이토록 자명한 자연의 섭리에서 주영은 그리움의 자리를 찾는다. 시간은 흘러가더라도 그 시간을 느꼈던 감정조차 전부 흘려보내진 않을 거라는 작은 의지의 표명일까. 언젠가 주영은 예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예요. 언니가.


그들이 꾸고 있는 봄날의 꿈은 분명 엉성하지만 따스하다. 누군가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인해 단조로운 일상의 결이 생동하면 그제야 수색동의 청춘들은 좀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날카로운 현실의 감각이 침범하면 이 따스한 순간에는 여지없이 균열이 생기고 만다.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는 정범의 분노부터 간병이 힘에 부치는 예리의 절망에 이르기까지 아픔은 멈출 줄 모르고 찰나의 행복을 뒤흔든다. 이렇듯 핍진한 일상의 상처엔 늘 질척이는 욕창이 생겨난다. 이러니 우리는 늘 깨달을 수밖에 없다. 낭만의 늪에 빠지기엔 두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의 아스팔트 바닥이 너무나 단단하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예리가 떠났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는 남자를 따라서 홀연히 사라졌다. 주막에는 어느새 세 남자만이 남았다. 갑자기 화면 속의 세상에는 다채로운 색감이 입혀진다. 현실의 감각이 돌아오자 많은 것이 사라졌다. 익숙한 색깔의 일상에는 예리도 없고 시끌벅적하던 주막도 없다. 비로소 현실은 색을 칠했지만 온기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한번 돌이켜본다. 사람과 감정으로 가득했던 흑백의 세상을. 이제 그 세상은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세 남자는 꿈에서 깨어났다. 황량한 현실의 공기를 머금은 채로 말이다.



<춘몽>은 말한다. 그리움을 머금은 꿈의 시간에 색깔은 필요치 않다고. 그렇게 수색동의 추억은 흑백사진으로 남았다. 하지만 꿈은 항상 깨기 마련이다. 다시, 색깔이 입혀진 현실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을 추억할 만한 흑백의 시간으로 조각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질곡의 삶엔 우아한 선율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