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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5. 2018

녹슨 삶을 지탱하는 육체의 서사

영화 <러스트 앤 본>을 보고

소년 클레이에게 결핍은 일상이었다. 가난과 차별로 얼룩진 삶은 평범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버스를 탈 돈이 없어서 매일같이 뛰어다녔다. 이토록 지난하고도 고된 성장기는 그에게 비범한 자존감을 세워줬다. 노력을 거듭하던 끝에 클레이는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쏟아지는 냉대와 멸시를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찾아냈다. 바로 복싱이었다. 그에겐 인고의 세월이 빚어낸 단단하고도 날렵한 몸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며 사각의 링을 제패했다.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역사에 새겼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알리가 있다. 그 역시도 전직 복서다. 복싱과 킥복싱을 했었던 과거는 현재의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흔적이다. 그래서인지 가난함에 짓눌려 바닥을 전전하는 일상 속에서도 알리는 운동을 놓지 않는다. 이른 아침마다 그의 거친 뜀박질은 삭막한 일상을 예열하며 생동하는 한 인간의 야생성을 조망하는 듯하다. 이윽고 땀방울이 맺힌 그의 얼굴은 집의 녹슨 대문과 교차되며 완연한 생기를 뿜어낸다. 하지만 여전히 알리는 당장 내일만을 고민하는 삶에 갇혀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에게 본능적인 선택이 익숙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테파니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모두 잃었다. 육신의 상실은 그녀에게 차분한 절망으로 다가온다. 소리 없이 절규하고 칼을 손에 쥔 채 죽음을 음미하는 모습은 지독하게 황망한 자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다. 매일 자신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주는 이들은 비참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저 황량한 일상의 지반을 딛게 해줬던 다리는 사라졌고 그녀의 마음도 끝 모를 어딘가를 향해 침전한다. 문득, 그녀는 언젠가 아픈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던 손길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득한 기억의 끝에서 알리를 소환한다.



그녀가 절실한 마음으로 불러낸 알리의 존재는 의외로 건조하다. 그는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최소한의 친절만을 보인다. 무심과 배려 사이를 거니는 그의 심심한 태도는 외려 그녀를 세상 밖으로 인도한다. 짙은 암연의 세월을 걷어내듯 알리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스테파니에게 수영을 권한다. 그녀가 조금 주저하자 알리는 지체하지 않고 먼저 수영을 하러 떠난다. 자신을 뒤로 하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영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수영을 끝마치고 스테파니는 알리에게 말한다. “이제야 살 것 같네요.” 그녀에게 거칠면서도 투박한 알리와의 만남은 그 어떤 배려보다도 따뜻했고 비로소 자신을 평범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섹스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가늠케 하는 매개가 된다.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에게 섹스는 낯선 도전이자 자아의 존재감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이다. 평범한 삶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여성적인 자존감은 사치와도 같다. 아름다운 옷들을 미련 없이 버리는 그녀의 담담한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던 찰나에 맞이한 알리와의 섹스는 그녀에게 생경한 감정을 일으킨다. 원초적인 본능을 통해 모든 감정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는 자신감은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그리고 케이티 페리의 노래에 맞춰 절제된 춤사위를 뽐내며 평범했던 과거를 재현해내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로 자리매김한다. 춤을 마치고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간 스테파니는 알리를 더욱 애틋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반면 알리에게 섹스는 본능적인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기회 그 자체이다. 숱한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는 그에게 스테파니 역시 한 명의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녀에 대한 각별한 연민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녀와의 섹스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 출장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물론 알리는 스테파니와 즐기는 쾌락에 일말의 의무감을 곁들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출장이라 불리는 섹스는 힘겨운 삶들이 자아내는 희로애락을 격렬하게 해소하는 시간에 불과하다. 사실 알리에게 섹스가 거창할 이유는 없다.


그 역시도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는 나약한 존재이니 말이다.



일상을 버티기 위해 알리는 돈이 필요했고 끝내 길거리 싸움을 택한다. 오로지 삶과 싸움판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아래 그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지친 몸이 찾아가는 곳은 어린 아들이 있는 집이다. 영화 속 알리의 모습은 좋은 아빠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폭력적인 언행으로 점철된 그의 훈육은 싸움판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그에게 의도적인 폭력성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싸움판에서 번 돈으로 무심하게 아들에게 줄 장난감을 사오는 장면은 영락없는 가장의 책임감과 애정을 비추고 있다. 가끔씩 거친 본성이 자리를 가리지 못할 뿐 언제나 알리에게 아들은 희망이자 삶의 이유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얼음에 갇혀 허우적대는 아들을 구하는 알리의 모습을 바라보자. 연신 무덤덤했던 그의 표정은 처음으로 요동쳤고 단조로웠던 감정의 결마저 일그러졌다. 상실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서야 아들의 존재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절감한 그는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얼음을 내리친다. 어렵사리 구해낸 아들의 차디찬 몸을 안고 뛰어가는 알리의 발자국은 유난히 깊게 파인 채 남는다. 정말 소중한 존재의 무게감을 여실히 느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전화기 너머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다. 스테파니가 다리를 잃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은 것처럼 그도 손을 깨뜨려야만 하는 절박함 앞에서 비로소 감정에 솔직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모두에게 새로운 인생이 찾아온다.



<러스트 앤 본>은 본능의 이미지즘을 탁월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지질한 일상을 잠식하는 오감을 원초적인 이미지에 투영시키며 서사의 강약을 조절해나가는 자크 오디아르의 연출력은 매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가령 바닥을 나뒹구는 핏빛 치아를 보며 우리는 인물의 처절한 삶을 가장 실감나게 대면한다. 그럼에도 꾸준히 교차하는 인물들의 슬픈 이미지는 결국 모두의 아픔을 용감하게 대면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승화된다. 마지막에 카메라를 바라보며 불끈 쥐어 보인 알리의 손에서 저 위대한 무하마드 알리의 집념과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마도 우연이 아닐 테다. 나지막이 그의 손이 말한다.


살아가기에 위대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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