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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6. 2018

황량한 착취의 역사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를 보고

텍사스의 거친 모래바람이 걷히면 정적만이 가득하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조명하는 삶은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도입부에 나타나듯이 대출과 채무 구제를 광고하는 팻말 너머에는 거대한 석유 펌프가 즐비하다. 같은 곳에서 누군가는 없는 돈을 쫓고 누군가는 굴러오는 돈을 잡는다. 그렇게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자본의 그림자는 비루한 개인의 삶을 잠식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시대를 개탄하며 분노를 머금은 사람들의 아우성은 한낱 낡은 벽에 칠해진 낙서에 불과하다. 낡아버린 건물에는 실로 처절한 현실만 존재한다. 그때 홀연히 들려오는 강도 소리는 극의 자연스러운 변주를 매개한다.


태너와 토비는 바로 거기에 있다.



형제인 두 사람은 함께 은행을 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과 땅이 넘어가게 생긴 마당에 착실한 노동은 최악의 선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생이 세우는 치밀한 계획 덕분에 그들은 목돈을 마련하는데 성공한다. 이 소식은 지역 보안관인 마커스와 알베르토에게 들어가게 되고 그들은 합리적인 이성과 동물적인 직감을 바탕으로 범죄의 흔적을 뒤쫓는다. 각자가 집어든 퍼즐조각이 어긋나고 맞춰지는 순간의 연속은 꽤나 조밀하게 직조된 채 탄탄한 당위를 담보한다. 더불어 날선 카우보이들이 뿜어내는 서부극의 향기는 괴괴하고도 처연하게 영화의 분위기를 조율한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인물과 행동을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구분하며 선악의 대치라는 서부극의 오랜 전통을 거부한다. 태너와 토비에게 우선적인 가치는 언제나 가족이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자신들을 위험에 몰아넣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들을 잡고자 하는 마커스와 알베르토 역시 올바른 사회의 정의를 추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행위보다 발화에 초점을 맞춘다. 맥락을 차치하고 절대적인 악행으로 비춰질 수 있는 강도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대신 강도질을 해야 하는 지당한 이유에 주된 초점이 맞춰졌다. 영화는 절망의 끝에서 위태로운 끈을 잡은 이들이 받을 도덕적 힐난의 여지를 협소하게 설정하며 인물을 넘어 사회의 씁쓸한 단상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파편화된 군상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지키고 얻기 위해 총을 겨눈다. 총을 집어든 배경과 저의를 따지기에 그들의 삶은 너무나 팍팍하고 여유가 없다. 더 나아가면, 이들의 역사가 그러했다. 마커스와 알베르토의 대화가 이를 방증한다. 인디언의 후손인 알베르토는 은행을 바라보며 선조들의 터전을 빼앗은 이들의 후손이 다시금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다며 혀를 찬다. 숱한 세월이 지나도록 벌여온 피의 역사는 땅의 뿌연 먼지 아래 자리매김했고 여태 유효하다. 안 그래도 궁핍한 삶의 흔적은 모래만큼이나 텁텁하기에 그 누구도 타인의 부당한 침범은 용납할 수 없다. 결국 영화는 개인들이 겨누는 총을 통해 뼈아픈 착취의 역사를 긁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백인 마커스와 인디언 알베르토의 남다른 유대감은 반복되는 역사의 한 줄을 비틀면서 작은 위안을 선사한다.



선택이 사치인 삶에서 필연적인 착취로부터 오는 무망함을 각자의 방법으로 감내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실로 인상적이다. 태너는 직선적으로 행동하며 투박하게 삶을 헤쳐 나가지만 자신만의 곧은 심지를 내재하고 있다. 포커를 치던 도중 신경전이 붙은 코만치족을 향해 자신 역시도 코만치라고 응수하는 모습은 인디언의 삶에 못지않게 험난한 일상을 영위하는 자의 고독함과 끈기를 가장 잘 표현해내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염세적인 면모를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하루를 매일같이 던져버린다. 걷잡을 수 없는 자동차 속에서 브레이크를 잡지 않는 대담함에 비유한다면 적당할까.
 
반면 토비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자신의 가족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강도질과는 연이 닿지 않은 천성 때문에 그는 갈등하고 초조해한다. 그럼에도 토비는 저돌적으로 나아간다. 도로 위에서 목적지를 물으며 심문하는 경찰을 향해 이 길밖에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토비의 의식은 눈부시게 빛을 발산한다. 가난을 물려줄 수 없다는 일념의 힘은 총에 맞아 혼미한 그를 너끈하게 지탱한다.



영화는 수많은 삶을 대치시키고 싸우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주목해야할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영화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거대 자본 집단이다. 비극적인 형제의 행보는 부당하게 차압된 재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텍사스의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비춰지는 금융권 광고는 전전긍긍하는 서민층의 애환을 대변하며 거대 자본의 횡포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태너와 토비처럼 강도질을 하지 않고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기존의 상식과 도덕적 관념을 파괴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는 탐욕적인 자본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도록 하는 선택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따라 달리는 자동차처럼 <로스트 인 더스트>는 현재진행형인 착취의 역사를 담아냈다. 주연과 조연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인물들이 강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한 종업원 할머니를 바라보며 이 음식점은 그 누구도 털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마커스의 생각처럼 뺏기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스스로 강해졌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외부의 힘에는 한없이 약해지는 역설적인 현실에 여전히 살고 있다. 정녕 황량한 들판에 희망은 없는가.


안타깝게도 여전히 먼지는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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